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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일상 Oct 08. 2023

이사 가는 날

일상 04. 나의 집 안녕, 고마웠어


첫 신혼집은 21평의 복도식 아파트 10층이었다.

전세 계약 기간 2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집주인은 새로 분양받아 들어간 아파트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며 전세 연장이 아닌 매매로 내놨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남편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아파트로 다시 전셋집을 구했다. 역과도 가깝고 초등학교를 끼고 있는 작고 아늑한 동네였다.

여러 집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우리가 원하는 날짜에 나온 전세 매물은 딱 한 집뿐이었다. 다른 매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이사 날짜가 다가오자 마음이 급해졌다.






복도식 아파트 106동 506호.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1~3호 집은 왼편에, 4~6호 집은 오른편에 있었다. 우리가 이사 갈 집은 504호, 505호 복도를 지나 복도의 가장자리 맨 끝 집 506호였다. 집을 보고 나오는데 옆집이 마음에 걸렸다. 506호를 가려면 꼭 지나가야 하는 505호 앞에는 양쪽 집 복도까지 반씩 다 차지하는 장독이 줄지어 서있었다.

위로 매달아 놓은 줄에는 메주와 시래기가 있었고, 장독 뚜껑 위로는 말린 생선, 버섯, 나물들이 널어져 있었다. 검정 긴 고무장화 옆에는 삽이나 낫, 갈퀴 같은 연장도 보였다. 좁은 복도에서 된장과 생선 등 여러 가지가 섞인 꼬릿꼬릿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봄인데도 냄새가 나는데 곧 다가올 여름에는 이 옆집에서 어떻게 살지 막막했다. 분주하게 나와있는 복도의 살림살이들에도 한숨이 나왔다.






이사 갈 곳 집안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복도 앞에서 옆집에 사시는 할머니로 보이시는 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새댁이 이사 오려고? 에고~ 뱃속에 애기도 있네." 8월에 출산을 앞두고 있던 터라 누가 봐도 임산부로 보이는 내게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시끄러울까 봐 걱정하시는구나.. 옆집으로 이사 오면 복도에 내어놓은 장독대에서 나는 냄새가 내겐 더 걱정인데..'






우린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해 봄, 우리는 이사를 했다.

어른이 서서 밀어줄 수 있는 손잡이가 달린 뿡뿡이 자전거에 세 살 된 봄이를 태워 놀이터에도 가고, 아파트 장이 서면 구경도 갔다. 또래 아이 엄마들도 많고 이사 온 동네가 좋았다. 단, 장독대에서 풍겨오는 지독한 냄새만 빼면 말이다.






그해 여름, 8월에 둘째 여름이를 낳았다.

무덥고 푹푹 찌는 폭염을 뱃속에서 함께 견딘 여름이는 다행히 건강하게 태어났다. 산부인과에서 집으로 왔는데, 첫째 봄이와 달리 여름이는 수시로 울었다. 복도식 아파트에 신생아 울음소리가 밤낮으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응애~~!   응애~~~!!" 나는 내심 옆집 할머니께 너무 죄송했다.






복도식 아파트인데도 옆집 할머니는 아주 추운 날과 밤을 제외하고는 늘 현관문을 열어두고 지내셨다.



현관문 너머로 동그란 식탁이 보이고, 하얀 러닝셔츠를 입은 할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신다. 할머니는 혼잣말을 하시며 식사 준비로 집안을 분주히 왔다 갔다 하고 계신다. 봄이와 나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면서 여름이를 태운 유모차가 장독에 부딪치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밀면서 그 비좁은 복도를 지나간다.



할머니는 가끔 직접 농사지은 옥수수나 고구마 등을 쪄서 애기들 주라고 갖다주셨다. 나는 가끔  빵을 사다 드리고, 수박이나 참외 같은 과일을 갖다 드렸다. 할머니께서는 늙은 노인네가 무슨 빵을 먹냐면서 손사래를 치시지만, '그래도 한 번 드셔 보세요. 맛있어요.'라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빵을 들고 집에 들어가신다.






2년이 지났다.

봄이는 다섯 살, 여름이는 세 살이 되었고 뱃속에는 가을이가 자라고 있었다. 아이들이 커서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놀 때도 있고, 뿡뿡이 자전거나 유모차를 밀며 지나갈 때 장독을 부딪쳐 깨뜨리지 않을까 늘 조심스러웠다.

몇 달 후면 셋째도 태어나고 지금 살고 있는 방 두 개짜리 21평 아파트가 좁을 것 같아서, 옆 단지에 있는 방 세 개짜리 아파트 23평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했다.






이사 가는 날 복도에서 우리 엄마가 옆집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저희 손녀딸이 많이 울어서 옆집 할머니께 늘 죄송하다고 딸이 그러더라고요. 많이 시끄러웠을 텐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제가 이사 가는 날이니까 말씀드리는데요. 새댁이 이사 가니 너무 좋아요. 2년 전에 새댁이 어린것 손 하나 붙들고 배가 불러서 집을 보러 왔는데 영 마음이 안 내키더라고요. 이사 안 오면 좋겠다 했는데... 흠... 왔더라고요." 하면서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다시 말씀을 이어가셨다.



"실은 이 집이 사람이 죽어나간 집이에요. 사람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집에 젊은 새댁이 어린것 하나에 배까지 불러서 이사를 왔는데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태어난 애기가 밤낮으로 울길래 저러다 큰일 나겠네 싶었는데 이렇게 무사히 잘 크고, 더 큰 집으로 이사도 간다니 이제야 제가 두 다리 뻗고 자겠어요."



할머니 말씀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갑자기 눈물이 날 뻔했다. 그간의 오해가 죄송했다. 이삿짐을 다 뺀 텅 빈집을 한 번 둘러보는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철부지 어린 새댁은 아무것도 모른 채 두 해를 506호에서 무사히 보냈다.


유난히 울던 우리 여름이가 정말 그 집 터가 안 좋았기 때문이었을까. 혹시나 늘 현관문을 열어 두고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신경을 쓰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사람 죽은 지 얼마 안 된 집에 젊은 부부가 이사 와서 애기 둘을 키우며 사는 것이, 괜한 마음에 속으로 노심초사하셨던 것은 아닐까.


장독대와 갖은 살림살이를 늘어놓은 복도가 할머니의 내어놓은 마음 같아서, 못내 투덜거리던 철부지 같은 마음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복도식 아파트 106동 506호. 

나의 집 안녕.. 고마웠어.
세 살 봄이가 텔미 노래와 춤을 추던 곳.
여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
나의 철부지 마음으로 살아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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