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20. 모든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아침부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불안감이 스쳤다. 출근 후 주차해 둔 내 차를 긁었다는 전화였다. 바깥에 나가보니 생각보다 많이 긁히고 찌그러졌다. 사고 보험처리를 하기로 했다. 상대는 죄송하다고 했다. 이럴 때 난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습관처럼 '네.. 감사합니다' 해놓고는 이건 아닌가 싶어서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신데요. 괜찮습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덧붙였다. 보험처리를 하기로 하고 직장으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난데없이 주차해 놓은 차가 찌그러져 당황스럽고 돌이킬 수 없음에 화가 났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은 사고여서 다행이었다. 또, 상대방이 여러 번 죄송하다고 하자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할지 난감했다. 얼마 후 보험 신청을 했고 죄송하다는 내용의 전화가 왔다. 괜찮다고 하는 것도, 감사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어떻게 대답을 하지 잠깐 사이에 머리에 지진이 났다. 결국 '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사고 당일은 바빠서 차량 수리를 못 맡기고, 하루 지나서 퇴근 후 차량 수리를 맡기고 왔다. 견적이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물론 내 차를 수리하는 시간 비용이나 나의 정신적 손해가 있지만, 상대측에게 과한 손해배상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측에게 보험 금액이 많이 오르는 건 아닌지 수리 기사님께 물었더니 50만 원이 나오나 150만 원이 나오나 200만 원 이하는 똑같다며 상대측 견적비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마음이 쓰였다. 몇 달 전 나도 주차하기 위해 후진하다가 대물 파손을 해서 보험처리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니 생각지 못한 이득이 생기면 다른 곳에서 구멍이 나서 맞춰졌다. 예기치 않게 빠져나가는 비용이 생길 때는 다른 부분에서 채워지기도 했다. 모든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는데. 세상 이치가 그런가 보다.
수리 기간이 일주일이나 걸린다고 해서 렌터카를 신청했다. 배정된 차가 무려 신형이었다. 오래된 차를 타다가 새 차를 타니 승차감이 좋았다. 좋은 신발이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속담처럼 새 차가 꼭 좋은 길로 안내해 줄 것만 같았다. 들뜬 기분과는 달리 새 차를 타고 다름 아닌 집으로 바로 왔다. 렌터카를 타다가 괜히 또 다른 사고가 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게 사서 걱정을 한다고 그냥 타고 다니라고 했다. 하지만 거침없이 타고 다니기에는 너무 새 차였고, 너무 남의 차였다. 승차감은 좋지만 마음은 불편해서 주차장에 고이 모셔놓고, 다음날 아침 여름이와 나는 걸어가기로 했다.
여름이도 학교 가는 길이 좁고 차들이 많아 다른 차에 긁히면 어떡하냐고 며칠은 걸어가자고 했다. 우리 둘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섰다. 도로에 있을 때는 차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 차가 막힌다고 생각했는데, 걸어서 출근해 보니 걸어 다니는 사람만 보였다. 내가 아는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었다. 또, 내 앞에 놓인 일들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2024.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