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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계일주 Nov 29. 2024

나도 오늘 같은 날은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일상 21. 맞네. 찐 사랑


어제 첫눈이 내렸다. 직장 주차장에 세워 둔 차 위로 수북이 쌓인 눈을 치우면서도 눈이 많이 오니 아이들이 얼마나 신날까 생각했다.



봄이는 2학기부터 다시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오는 날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전철 타고 갔으면 힘들었을 텐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께 밤 12시가 넘어 첫눈이 온다며 들떠서 동영상을 찍어 보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서는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고,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학교 풍경 사진을 보내주었다.



여름이는 어제 눈 내린 산을 가로질러 집에 온 것도 모자라 밤 열 시에 동생 가을이, 겨울이와 함께 패딩을 입고 눈싸움을 하고 오겠다며 아파트 놀이터에 갔다. 셋은 신발도, 장갑도, 패딩도, 머리카락도 젖은 채 집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쌓인 눈이 겨울이 무릎까지 들어갈 정도로 눈이 엄청 많이 왔다고 신나 했다. 도대체 머리는 왜 젖은 건지 물었더니 눈밭을 뒹굴었다고 했다.




아침 7시에 창문을 열어 눈이 내리는지 내다봤다. 잠시 소강상태였다. 이 정도면 걸어갈 수 있겠다 싶었다. 아이들 학교 등교 시간은 10시로 미뤄졌다. 폭설로 인해 급식도 불가능해져 단축수업을 한다는 문자가 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재난 문자가 새벽부터 몇 차례 왔다.



출근길에도 눈이 휘몰아치게 내렸다. 오랜만에 걸어서 출근을 했다. 아이들이 말한 눈이 겨울이 무릎까지 들어간다는 길을 걸었다. 다행히 사람들이 지나간 길이 나있었다. 부츠를 신었는데도 아파트를 벗어나기 전에 이미 물이 들어가 발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눈이 내려 우산을 쓰고 걸었다. 도로는 차바퀴가 지나간 자리만 길이 나있고 곳곳에 눈더미가 쌓여있었다.



흠뻑 젖은 축축한 양말, 차가워진 손과 발, 질퍽한 도로를 지나가는 차 소리, 온통 하얀 길, 아직 제 생을 다하지 못한 단풍잎이 눈 위로 별처럼 내려앉았다. 가을이 가기 전에 겨울이 성급히 온 느낌이다.






출근해서 한 직장 동료에게 "어제 집에는 잘 갔어요? 오늘도 출근하느라 힘들었죠?"라고 물었더니 "어제 퇴근할 때 주차한 차 빼기가 힘들어서 아빠가 데리러 오고, 오늘 아침에도 아빠가 데려다주셨어요."라고 했다. 아.. 그러면 되는구나. 그 생각은 못 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서슴없이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부모님이든 남편이든 자식이든 누구이든. 이십 대이고 아빠랑 같이 사니까. 눈이 많이 내려 혼자 차 위 쌓인 눈을 치우고 도로 위를 엉금엉금 올 딸이 염려되어 열 일 제쳐두고 오셨을 것이다.



나도 열아홉 살 때까지 그랬는데. 스무 살 이후로는 나를 기다려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 갑자기 아빠가 돌아가셨다. 남은 가족들이 서로 위로가 되는 게 아니라 제각각의 슬픔을 혼자 가졌다. 슬픔을 슬픔으로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뭐든지 혼자 힘으로 해야 하는 걸 그때 배웠다. 이제는 혼자 하는데 이골이 났다.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최고의 방법은 아닐지라도, 내가 가진 자원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살았다.



오늘 아침에 알았다. 어제 그 많은 눈을 치우고 주차장에서 혼자 못 빠져나와 낑낑 대면서도 몰랐다. 당연히 내 몫인 걸 알고,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다. 혼자 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는데 직장 동료의 '아빠가 데려다주셨어요'란 말에 가뜩이나 내려앉은 내 어깨가 무릎까지 내려간다. 그리움인지 원망인지 애석함인지 모를 감정들이 섞여 하얀 눈이 휘몰아쳐 쌓이듯이 무섭게 쌓여 마음이 묵직하다. 습설처럼 무겁다.







퇴근하려고 나서는 길에 오늘도 눈이 많이 와서 어떻게 가는지 물었다. 누구는 버스 타고 가고, 누구는 걸어가고, 누구는 차를 천천히 끌고 가야 한다고 했다. 그중 오늘 아침에 이야기 나눈 이십 대 동료가 말했다. "아빠가 데리러 온대요."  그러자 누군가 부러운 듯이 말했다. "찐 사랑이네. 찐 사랑이야."



맞네. 찐 사랑. 나 혼자 나직이 되뇌었다. 찐 사랑이네. 아빠가 딸을 데리러 오는 마음이. 나도 오늘 같은 날은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 남편은 있으나 마나 하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애꿎은 남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누가 나를 욕 하나 왜 갑자기 귀가 가렵지 하겠다. 남편 둥절.



어젯밤 아이들의 젖은 신발과 패딩을 마른 수건으로 꾹꾹 눌러서 닦은 다음 신발은 건조기 위에 널고, 패딩은 드라이기로 한 번 더 솜을 말리고 옷걸이에 걸어 보일러를 킨 따뜻한 방바닥에 널어놓으라고 했다. 아이들이 한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그랬는데 애들도 나처럼 찐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가짜 엄마일지도 모른다고.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아도 오늘은 일찍 끝나는 날이라 좋았다. 이미 젖은 신발이라 눈을 푹푹 밟으며 걸었다. 낮이 되자 눈이 조금 녹아 횡단보도 앞은 얕은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되었다. 도로는 바퀴가 지나간 곳을 제외하고 눈이 쌓여 밀려오는 파도를 넘듯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침 출근길에 본 단풍나무가 참 예뻤다. 온통 하얀데 혼자만 꽃단장 한 신부처럼 화사했다.







20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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