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희란 작가의 존재에 대한 자기 확신의 몸부림
본질에 앞선 것이 존재라고 했던가. 천희란 작가의 소설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속에 9편의 작품들은 처절한, 때로는 자기 분열적이고 광기적인 작가의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먼저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에서는 아홉 살 라우라가 카밀라를 만나, 그녀가 만든 여자들이 사는 저택에서 살면서 엄마의 폭력적인 남자들과 그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삶이 드러난다. 카밀라와 라우라, 다시 반년이 되기 전 갓난아기 때 저택 앞에 버려진 또 다른 나인 카밀라로 내려오는 그들의 서사에서 천 작가는 불쑥 유산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 역시 아직 내 어머니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선택해야 한다. 어떻게든 그것에 대한 책임과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p35
인간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본질적 질문보다 ‘여성’이라는 존재에서 그가 선택한 ‘소설가’라는 숙제에 대한 그만의 대답의 도입부로 예열되듯 타들어간다.
「기울어진 마음」에서는 대학생 기호의 이모인 ‘승은’에게서 기호와 혜원에게 어림과 꿈을 핑계로 임신중절을 선택하게 하려는 또 다른 라우라의 엄마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호와 혜원이 존재했던 그들만의 이야기 속에 기호가 군대가 있는 동안 혜원은 어학연수를 다녀오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찾아왔지만 떠밀러 가듯 살아가던 삶에서 ‘아기’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서 같이 키우는 일이라면 보람을 찾을 것이라는 ‘잉태’의 유산을 그들 스스로 선택하게 된다.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에서는 소설가가 된 ‘그녀’와 문학계에 이름이 알려진 스무 살 많은 ‘남자’와의 불륜 관계의 지난날들을 ‘그녀’를 따라간 전지적 시점의 ‘나’가 되살린 기억들로 전개된다.
남자와의 광기 어린 사랑이 마치 ‘그녀와 나’를 오고 가면서 작가의 정신세계가 여러 겹의 수국 꽃잎 속을 떠돌아 하나의 ‘수국’이 될 때까지 남과 여, 그리고 소설가라는 본질을 찾아다니다 혼란스러운 여정을 겪고 마침내 기억 속 존재를 인정하고 머물기로 한 작가의 방어적인 속내를 은밀하게 보여준다.
「피아노 룸」에서는 기억을 잃어버린 고모의 위독함을 알고 찾은 ‘나’가 살해당한 고모부와의 관계에서 정작 고모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녹아냈다.
목격자이면서 그 장면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충격과 공포보다 살해당하기 전 이미 고모부와 헤어질 것을 결심하고 살인사건 이후 바로 그의 아이를 지워버렸다는 기억, 그 자체가 가혹한 형벌이었다는 고모의 말을 떠올린다.
‘아이’라는 존재를 지우고 나니 이미 죽은 ‘남편’과는 이별 선언 없이 헤어질 수 있게 된 동시에 결국은 영영 헤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깨달음을 비행기 속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눈을 뜬 ‘나’가 고모의 유산이 된 퍼즐 조각의 기억들을 완성시킨다.
「살인자의 관」에서는 어린 시절 폭력 속에 자라던 ‘그녀’가 산속 오두막집에서 한 남자를 살인을 하게 되는 과정을 환상과 묘사가 적나 하게 거친 야성적인 문장으로 드러나 있다. 허구를 기반으로 쓴 소설이라는 본질에서 다시 고뇌하는 작가는 끝마무리에서 ‘나’를 불쑥 개입시켜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현실이다”라며 존재의 강한 확신을 부여한다.
「잃어버린 것」에서는 ‘돌멩이’와 관련된 말장난 같은 ‘너’와 ‘나’, 그리고 ‘그’가 나온다. 끊임없이 주저리 말이 이어지며 뭔가 잃어버린 것을 찾지만 그 돌멩이마저 소중한 게 아닌 게 되는 논리에 빠지고 “이젠 내 캄캄한 어둠도 다 소진되었지”라며 떠나버린다.
오직 남는 것은 찾아다녔던 작가의 채워진 글을 읽으며 일상생활에서 허전한 무언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찾아 나서야 하는 독자의 몫이다.
「천진한 결별」은 40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아 료칸으로 떠난 여행지에서 이혼을 승낙하는 남편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내가 그동안 참고 살아야 했던 것이 결국 남편의 성 정체성이 ‘여성’인 것에 기인된 것으로 해석된다. 남편은 “남자애잖아”라는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천 작가는 ‘기억’된 것들을 ‘존재’의 자기 확신으로 연결시킨다. 남편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여자아이들 놀이와 호기심 많던 엄마 물건, 남자아이들과 같이 화장실을 쓰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불편했던 그 모든 경험이 끝내 여성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자신을 부정해 나에게 했던 그 말을 기억했고 그 두려움을 삼십 년 전 막내아들에게 던졌던 그 말을 기억해내며 자신의 두려움을 알게 된다.
아내의 이혼 요구를 승낙하면서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되면서 어쩌면 비로소 천진난만하게 자신의 남성과의 결별을 통한 성 정체성 찾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길은 이제 막다른 길이면서도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는 여정이 될 것이다.
「숨」은 70대 정희가 60대 해옥이와 함께 아파트 청소일을 하면서 겪는 일상생황 이야기다. 특별한 것은 정희는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자를 좋아했던 수경과 사귀었던 지난 사랑이 사랑의 전부였다.
죽은 순영을 통해 가까워진 둘은 함께 수영장을 다니면서 항상 수동적인 정희는 물속 부력이 다시 떠오를 거란 믿음처럼 자신이 오래전부터 물을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해옥의 어려운 삶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게 된다.
「지속과 유예」은 여자가 사촌언니의 자살시도에 이은 자살을 겪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은 사람을 위하는 수의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던 중 버스 정류장에서 메모 하나를 발견하고 떼어내기를 반복한다. “오늘 나는 이 삶을 끝낸다”라는 메모는 여자의 지난 기억을 깨우고 귀신을 보는 중학생 ‘아이’는 집안의 신기를 받아야 한다는 엄마의 말을 듣지만 육교에서 뛰어 자살한 단발머리 친구로 인해 신당이 아닌 심리상담사를 찾을 수 있었다.
여자와 아이는 각자 독립적인 이야기로 전개되는데 서로 연결되는 것은 자살한 언니와 단발머리 친구 밖에는 없다. 유독 눈에 띄는 작가의 메시지가 혼란해진 머리를 맑게 만든다. 아이가 엄마가 임신 초기에 유산으로 죽은 언니가 있다는 말뿐인 것에 대한 자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곧 깨달았다. 아이에게는 언니가 없었다. 언니가 존재했던 순간은 단 한순간도 없다. p261”
‘라우라’가 엄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것과 ‘아이’의 자각의 시작은 ‘자기 확신’이라는 존재의 가치와 함께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생기게 하는 유산이 됨을 알리고 있다.
문학동네 · 2022년 03월 24일 출시
천희란 작가는 201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영의 기원』, 경장편소설 『자동 피아노』가 있다. 2017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 ㆍ 007
기울어진 마음 ㆍ 037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ㆍ 079
피아노 룸 ㆍ 111
살인자의 관 ㆍ 149
잃어버린 것 ㆍ 181
천진한 결별 ㆍ 199
숨 ㆍ 211
지속과 유예 ㆍ 243
해설 | 이지은(문학평론가)
상속자의 프롤로그 ㆍ 275
작가의 말 ㆍ 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