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전

[백일 백장] 100-52

나는 '새벽형 인간'이다. 알람 설정을 해 두긴 하지만, 그동안 알람이 나를 깨우는 게 아니라 내가 알람을 재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알람 입장에서는 울어보지도 못하고, 꺼버리니 머쓱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했다. 에고, 늦을라. 서둘러 길을 나서본다.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갑자기 핑그르르한다. 심쿵한 나는 직감적으로 약국을 찾았다. 특별히 무리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몸이 왜 이러지. 나는 당혹스러웠다. 지난 며칠을 되짚어 봤다. 이유가 뭘까.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아무래도 나는 기가 빨렸던 것 같다. 며칠 전 나는 새로운 동료들을 만났다. 어림잡아 사십 명쯤 된다. 그중 남성은 두어 명 정도이니, 압도적인 여초집단이다. 사람들은 여자들이 모여있으면 말도 탈도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글쎄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여자들의 진한 우정을 발견하게 될지. 너무 단정 짓지 말기로 한다. 결단코 그들이 나쁘거나 싫은 게 아닌데, 이렇게 어지러운 것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여자분들은 멀쩡해 보이는데, 내가 남자인 건가. 이젠 별 뻘 생각까지 든다. 졸지에 나는 몇 명 안 되는 남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여자가 되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기는 활동하는 힘이다. 고로 '기가 빨린다'는 표현은 내 활동력이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뜻이다. 답답한 마음에 기가 빨리는 이유를 검색해 봤다. '설마 이런 것도 검색이 되겠어?' 하는 마음이었는데,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 네이버 AI 브리핑이 알려준 몇 가지 원인 중 하나가 마음을 두드린다. '가면 외향형은 외향적으로 보이지만 혼자 충전하는 유형으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급격히 피곤해집니다.' 내가 내향형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 배터리가 방전되면 몸이 아플 수도 있구나. 나는 갑자기 나에게 미안해졌다.
게다가 나는 HSP(Highly Sensitive Person) 성향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장에 다녀온 이후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잘 들으려고 노력 중이기도 하다. 사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내 삶의 즐거운 영역에 속한다. 문제는 일대일 관계에서 다대일 관계로 며칠 사이에 사람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AI의 처방은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조절해 보라는 것이다. 어쩌면 누가 내 에너지를 빼앗아 간 탓이 아니라, 나 스스로 에너지를 흘려보내 버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