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사명

[백일 백장] 100-62

오늘은 '감정코칭' 프로그램의 첫날이다. 몸은 몹시 피곤했지만, 나는 살짝 설렜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자기점검 질문에 답을 해본다. 첫 번째 질문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이다. 첫 질문부터 제법 심오하다. 나는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다'라고 답했다. 내가 생각하는 성숙한 어른이란 나이만 차면 되는 성인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어지는 질문도 심상치 않다. 다음 질문은 '그걸 실현하는데 걸림돌은 무엇인가'이다. 나는 '나의 실패, 상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라고 적었다. 걸림돌을 떠올릴 때면 나는 슬프고, 마음이 묵직해 지곤 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동안 나는 글을 써왔다.
세계적인 심리학자였던 폴 에크만 박사는 인류의 보편적인 정서 표정을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 바로 '분노, 혐오, 공포, 기쁨, 슬픔, 놀람'이다. 각각의 감정에게는 맡겨진 임무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공포' 덕분에, 사람들은 고층 빌딩에서 함부로 뛰어내리지 않는다. 엄마 뱃속의 안락함과의 이별을 시작으로, 어쩌면 인류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정서를 엄선하여 갈고닦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힘든 일은 겪은 후 나도 여러 날을 고요한 마음을 갖고자 부단히 노력했었다. 이제는 좀 평안해졌을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아직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문득 '슬픔'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교수님, 사람에게 슬픔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일반적으로 슬픔은 다른 사람에게 나의 연약함, 힘듦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죠.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든 상태이니, 보호가 좀 필요하다'하고."
"그럼, 어떻게 하면 슬픔이 사라질까요?"
"나의 슬픔을 누군가 충분히 알아주면 해소되는 경우가 많지요. 보통은."
슬픔이란 불행이나 실패의 경험, 예측 또는 회고를 수반한 우울한 정서이다. 우리는 눈물을 흘림으로써 슬픔을 표현한다. 슬픔은 기쁨보다 훨씬 보편적이며,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기도 하다. 슬픔을 겪은 사람은 타인의 슬픔에 반응할 줄 알고, 공감할 줄 알며, 위로할 줄 알게 된다. 슬퍼해야 할 상황임에도 아예 슬픔을 배제해버리면 오히려 그 상처가 곪아 조울증이나 증오, 분노로 표출될 수 있다. 반면 위로받은 슬픔은 인생의 실패나 상처를 털고 다시 일어설 원동력이 된다.
순간 나는 마음이 찡해졌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괜찮은 척'을 했구나. 나는 몇몇 친구 외에는 가족에게도 나의 아픔을 알리지 않았다. 가족의 마음도 걱정했지만,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게 더 솔직한 이유였지 싶다. 아픔 따위는 덮어버린 채 지극히 평범한 일상인 듯 한동안 연극을 했다. 깨달음의 장에서는 오열했으며 피정에서는 울먹였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평범해졌다. 그나마 그때의 울음으로, 글쓰기를 통한 알아차림으로 나는 이만큼이라도 버틴 것 같다.
나는 완벽에 도전하는 무모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살면서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러나 나는 완벽하지 않은 내가 못마땅하다. 만약 신이 있다면, 내가 참 가소롭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아직 마음에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그러니 '너도 부족한 인간일 뿐인데, 오만하다. 겸손하게 받아들여라', '비현실적이다'라는 식의 일장 훈계는 사절하고 싶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 미소 짓는 가짜 표정과 감정노동에 지친 사람에게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교수님, 제가 괜찮아졌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픈 얘기를 해도 울지 않으면 된 겁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슬픔을 해소하는 다음의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재미있는 것을 즐긴다. 눈물을 흘리고 운다. 친구들의 위로를 받는다. 진리에 대해 묵상한다. 목욕하고 푹 잔다'이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는 정호승 시인의 시구처럼, 어쩌면 슬픔은 완벽을 꿈꿨던 사람에게 신이 주는 달콤 쌉싸름한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나의 슬픔의 메시지를 괜찮은 척 없이 오롯이 누군가에게 전달해 봐야겠다. 나는 아직 좀 더 울고, 위로받을 필요가 있다. 슬픔의 사명이 끝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