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진로 미시사

[백일 백장] 100-84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셨다. 커서 되고 싶은 모습, 장래 희망을 그림으로 그려오는 거였다. 그런데 나는 꿈이 없었다. 정말 뭘 그려야 할지 막막했다. 어떤 친구는 의사 선생님, 다른 친구는 대통령을 그렸다. 고민 끝에 나는 그냥 엄마를 그렸다. 그림의 제목은 현모양처였다. 우리 반에서 현모양처를 그려온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어느덧 나는 중학생이 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미술이었다. 내가 봐도 내가 그린 그림은 좀 특이했다. 잘 그린 건 결코 아닌데, 눈에는 띄었다. 백 미터 밖에서도 나는 내 그림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약간은 자유로운 영혼이었지 싶다. 하지 말라는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나는 결단코 시키는 대로 그리지는 않았다. 비틀고 꼬았다. 내 맘대로 오리고 찢고 그리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꼈다. 어느 날 미술 선생님이 엄마를 부르셨다. 그날 오후에 엄마가 '미술은 1등 해야 밥 먹고 살 수 있으니, 그냥 공부하자'라고 하셨다. 우리 집은 애 셋에 외벌이였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내신 점수에 꽂혔다. 쉬는 시간마다 분량을 정해서 매일 묵묵히 EBS 문제집을 풀었다. 그런데 수능 날 배가 아파서, 생각보다 점수가 안 나왔다. 대신 탄탄한 내신을 기반으로, 나는 학교장 추천 전형 대입 면접에 응시했다.
"역사 대신에 좋아하는 거 없어요?"
"그게, 요리를 좋아합니다."
"푸하하."
"제가 합격한다면 앞으로 인간이 먹는 것, 요리의 역사를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임기응변의 승리였을까, 꿈이 없는 학생에 대한 아량이었을까. 내 대답에 웃는 면접관들의 표정이 밝았다. 그리고 나는 꿈이 없었음에도 대학에 합격했다.
대학에서 나는 사학 외에도 신문방송학과 교육과학을 전공했다. 졸업하면 뭘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좋아하면 일단 해봤다. 각각의 학문에 각기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러던 중 졸업 직전 나는 교생 실습을 나가게 됐다. 아이들 앞에 선다는 건 짜릿한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선생님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 선생님이 되겠다는 사람이 한자를 몰랐다. 당시 임용고시 한국사에는 비문 해석이 주관식으로 출제되고는 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백조가 됐다. 핸드폰도 죽이고, 매일 묵묵히 도서관에서 천자문을 외웠다. 어느 날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영어점수 있지?"
"응, 혹시 몰라 따 뒀지. 왜?"
"꼴찌로 문 닫고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원서나 내볼래?"
인터넷으로 반나절 정도 원서를 써서 냈다. 큰 기대는 없었다.
"띠링"
그런데 서류전형 합격 문자를 받았다. 내게 옷이라고는 운동복 세트가 전부였다. 다음 날 동대문 두타 쇼핑몰에 가서 검은색 정장 세트를 오만 원에 샀다.
"띠링"
특유의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면접을 봤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렇게 다니게 된 직장에 나는 23년째 근속 중이다. 신입사원 시절, 학생같이 앳되었던 나는 화장실이나 옥상에 쭈그리고 앉아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리고 울 만큼 운 다음 나는 직장에서 '근면 성실'의 아이콘으로 변신했다. 지금은 왜 그랬나 싶은데, 그때의 나는 업무 홍수에 맞서 싸웠다.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다. 버티고, 해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사실 나는 다시 그렇게 삶을 살아 낼 자신이 없다.
어떤 사람은 20년이 넘는 시간을 한자리에서 계속 근무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말한다. 결코 나의 꿈은 아니었으나, 나는 매일을 그럭저럭 살아냈다. 사는 동안 나는 묵묵히 EBS 문제집을 풀고, 천자문을 외우고, 밀려드는 일을 해치웠다. 그런데 요사이 나는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렇게 진로 고민을 할 때는 막막하더니, 천신만고 끝에 꿈이 나를 찾아온 듯하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어쩌면 내가 묵묵히 해냈던 일상 자체가 꿈을 찾는 하나의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