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다는 것에 대하여

[백일 백장] 100-92

나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게 좋았다. 봉사활동이 끝나면, 내심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일로 접했지만, 점차 개인 봉사도 시작했다. 사회복지사 자격도 갖췄다. 나중에 은퇴하고 여력이 있다면, 봉사 활동을 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나의 봉사는 깊은 모순에 빠졌다. 통상, 보통의 봉사는 다음의 순서를 밟는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모종의 혜택을 받는다. 그리고 도움을 준 사람은 베푸는 기쁨을 알게 된다. 그런데 나는 나의 기쁨, 쾌감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웠다. 흡사 나의 봉사는 자기 치유이자, 내 안의 우월감을 키우기 위한 유용한 도구 같았다. '나는 남을 도울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충족감은 꽤 중독성이 강했다. 봉사를 거듭할수록 나는 좋으면서도 괴로웠다. 참으로 이기적인 도움의 손길이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다른 사람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봉사를 하는지 궁금했다.
며칠 전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듣다가 현타가 왔다. 머릿속이 찌릿했다. 나는 봉사는 봉사고, 나의 삶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에게 더럽고 힘든 일을 자처하는 봉사는 가끔 들어갔다 나오는 별개의 세계였다. 잘 나온 뒤, 문을 닫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실은 봉사는 내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였으며, 삶의 축소판이었다. 나는 그간 살면서 내가 숨 쉬듯 받아온 크고 작은 도움들을 찬찬히 되돌아봤다. 나는 힘든 일을 겪고는 마땅히 위로받아야 한다며 위로 안내서를 발간했었다. 상대방의 관심과 사랑이 나의 것보다 크지 않거나 전보다 줄어드는 것 같으면, 초조했으며 종국에는 도망을 치기 일쑤였다. 재테크를 할 때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지혜를 빌려 나도 이득을 보고 싶었다. 현실 세계의 나는 도움을 주기는커녕 정말 다방면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었다.
평소, 나는 주관이 희미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일에 대한 나만의 견해나 관점이 꽤 논리적인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거리가 생기면, 나는 내 주변의 현명한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견해를 묻곤 했다. 의견을 구할 뿐 아니라, 사랑, 이해, 관심, 위로 등 삶의 전반에서 나는 주기보다는 받기를 원했다. 물론 나는 내가 받은 것들에 대한 작은 보상도 잊지 않았다. 때로는 받은 도움이 너무 유용하거나 과하게 고마워 미안할 때면,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상당한 보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은 내가 더 많이 받아야 했다. 그래야 손해 보지 않은 흑자 인생이 완성될 것 같았다. 그런데 밑지지 않는 장사인데도 나는 꽤 자주 불안하고 괴로웠다. 어렵사리 목표를 이뤘을 때조차 기쁨 뒤에는 늘 허탈함이 함께였다.
석 달 전부터 나는 인생의 나침반을 찾고자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면서 나는 자립을 하고 싶어졌다. 내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찾을 수 있으면 진정한 홀로서기가 가능할 것 같았다. 사실이나 지식을 모르는 건 물어야겠지만, 나는 고민 해소책을 더 이상은 타인에게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다음 괴로움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상대에게 감정적 위안을 바라고 또 바랬다. 나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고, 위로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나를 힘들게 했다. 기대할수록 실망은 커지기 마련이었다. 가장 최근의 괴로움은 재테크 관련 조언을 받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됐다.
앞으로 나는 도움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 도움을 주는데 죽어라 마다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어느 정도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립한다고 마음먹은들 밥 한 수저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응축되어 있지 않겠는가. 가끔은 서툴러서 손해도 보겠지만, 그래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서 보고 싶다. 혹여 무엇 하나 아쉬운 부분이 생기면, 그 결핍으로 말미암아 나는 상대방에게 쉽게 예속되고 말 것이다. 나아가 나의 그릇이 허락한다면,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먼저 당신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관심 가지며, 위로해 주리라. 그러면 좀 더 가뿐한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