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디나비아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의 인상
“북유럽에 가면 거기 사람들은 다 큰데 나만 호빗 같은 거 아냐?”
북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 친구랑 이런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설마’는 왜 항상 ‘역시’가 되어버리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북유럽 여행의 첫 관문인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들어가는 비행기에서 느꼈던 당혹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으로 가는 노르웨지안의 작은 비행기 안, 나는 금발의 백인들로 가득 찬 그곳에서 홀로 유일하게 검은 머리 동양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도착해서 코펜하겐을 돌아다니면서도 당시엔 금발의 백인이 아닌 사람을 보기 드물었다. 갈색 머리의 여자를 한 명 봤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키는 또 다들 어찌나 그렇게 큰지! 남자 평균 신장이 180cm, 여자가 170cm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160cm를 조금 넘는 키인 나는 한국에서는 보통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길쭉길쭉한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마치 그들 사이에서 간달프 옆의 호빗이 된 느낌이었다. “거기 위에서 보는 전경은 어때요?”하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키가 한 2m는 되는 듯한 사람을 만났을 때 북유럽에 오니 내가 호빗같이 느껴진다고 농담을 하자 그는 정말 내가 호빗 같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될까 봐인 듯 웃지 않았다. 아니 농담인데 웃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내가 뭐가 되나, 이 사람아!
사실 처음에 북유럽 사람들을 마주하기 전에는 내가 그들보다 영어를 못한다고 무시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특히 옛날에 유럽 쪽에 교환학생을 갔을 때 만났던 덴마크 여자애가 동양애들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을 보고 무시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서 유독 덴마크가 겁이 났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 가면 서로 영어를 못하면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며 ‘너나 나나 쌤쌤이로구나’ 하고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는데 잘하는 사람들 앞에 서면 버벅거리는 게 유독 창피하다.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아예 시선의 높이가 차원이 다른 곳은 스칸디나비아가 처음이었고 그렇게 키 큰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사실 좀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래, 나는 그냥 지나가는 여행객이니까 구경이나 하다 가자.'라고 생각하고 현지인과의 교류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니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내 돈을 여기서 쓰는 손님 아닌가?! 당당해도 된다. 그래서 나는 선글라스를 장착하고 당당하게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이 키가 크다고 해서 살짝 위축은 될 수 있을지 언정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게 중에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은근하게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홀로 다니는 동양 여자에게 대놓고 말이든 행동이든 어떤 것도 한 적이 없었다. 내 주위에 다가올 수 없게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 있다든가, 아니면 내가 투명인간이 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를 신경 쓰지 않아서 조금은 심심하고 외롭기도 했다. 그 정도로 그들은 무표정하고 조용하지만 말을 걸고 도움을 청하면 대부분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의 여행은 좋은 사람들을 만난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했다.
엘프 왕국(?)을 구경하는 호빗처럼 (마법사 나라는 영화에서 본 기억이 안 나니까 그나마 친숙한 엘프 왕국으로 하기로 하자) 그들을 구경하면서도 나는 나 자신이 호빗(?)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다름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다녔다. 길이 울퉁불퉁해서 힐을 신을 수도 없을뿐더러 도보여행을 생각해서 힐은 가져오지도 않았던 터였기에 나는 거의 땅에 붙어 다녔다. 이들과 나는 다른 종족일 뿐 잘못된 것은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다니다 보니 그들을 올려다보며 길을 묻는 것도 그리 민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길을 묻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J. R. R. 톨킨의 소설 '호빗'을 영화화한 '호빗'에서는 여러 종족이 나온다. 각자 자기의 세계에서 살던 여러 종족들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원정대를 꾸려 힘을 모은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자기와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던 다른 종족과 친구가 된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이들을 보면서 호빗과 엘프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호빗이든 도워프든 엘프든 간달프든 간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간달프와 호빗만큼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현지인과의 교류가 아닌가 싶다. 해외에서 한국사람들을 우연히 만나는 것도 반가운 일이지만 외국에 있는 그 순간만큼은 아예 단절되어 그 속에 풍덩 빠져드는 것도 그 문화를 알고 여행을 즐기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자기들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렇게 서로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작은 하나하나를 나누게 되는 것만으로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다리가 생긴다. 그 다리는 서로를 기억하는 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 그러다 보면 혹시 또 아나? 언젠가 간달프와 호빗처럼 다시 보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