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

평범함의 위대함

by moka


북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유독 눈에 들어왔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검은 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올 블랙으로! 물론 검은 옷을 입는다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한국도 가을, 겨울에 길거리를 걷다 보면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투성이다. 게다가 나도 검은 옷을 즐겨 입는 편이긴 하다. 그렇지만 보통 여름에는 햇볕도 따갑고 해서 잘 입지 않는다.


이에 대해 너무 의아해서 구글로 검색을 해보니 과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올해 초 덴마크에서 호떡 파는 한국 청년 사업가로 유명한 김희욱 대표의 토크 콘서트에서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덴마크로 교환학생을 가면서 맺은 인연을 시작으로 석사 후 한국을 알리겠다는 신념으로 호떡 판매에서 시작해서 현재는 KOPAN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며 덴마크와 한국의 상호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김희욱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이는 북유럽에 통용되는 ‘얀테의 법칙’과도 관련이 있다. ‘얀테의 법칙’은 노르웨이 작가인 ‘악셀 산데모사’가 덴마크의 작은 마을을 모델로 하여 쓴 그의 소설에 나오는 것으로 평등을 추구하는 북유럽의 관습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을 드높이기보다 평범하지만 평등함을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 가치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북유럽 사람들은 이런 얀테의 법칙에 따라 검은색 옷을 입으며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평등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행 내내 눈에 엄청 띄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을 본 기억도 없다. 작년 10월 미술관에서 호피무늬 모피코트를 입은 사람을 봤을 때는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이 관광객일 거라고 자연스레 생각해버릴 정도였다.



<얀테의 법칙>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2. 당신이 다른 사람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3.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4.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확신하지 말라.

5.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6.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7.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잘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8.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말라.

9. 다른 사람이 당신을 신경 쓴다고 생각하지 말라.

10. 어떤 것이든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

11. 당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라.



처음에 '얀테의 법칙'에 관해 들었을 때는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뭔가 알쏭달쏭했다. 자만을 죄악으로 여길 정도로 겸손을 강조하는 듯한 이 11가지의 규율은 한국의 속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보다 훨씬 구체적이라서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은 생각에 고민을 해보다 보니, 척박한 환경에서 살았던 바이킹들에게 평등함을 강조하는 얀테의 법칙은 생존 법칙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적은 자원을 나눠가지며 평등함으로 공동체의 유대를 다지는 것이 그들의 존속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동질성을 강조하는 게 아닌가 싶은 면도 있어서 어떻게 보면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면 버티기 힘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닌 게 아니라 북유럽 사회에 대한 책과 보고서 등을 보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너무 다르게 튀는 사람들은 북유럽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경향도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수평, 대등함을 강조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위계질서나 엘리트주의 등으로 인한 문제는 없다. 우리나라의 흔한 갑질도 여긴 없다. 사람 수가 적으니 모두가 소중하다. 만인은 평등하고 똑같이 소중하다. 한 명 한 명의 의견이 중요하기에 모두가 동의할 때까지 회의가 계속된다. (그래서 회의만 하루 종일 하다가 결론 못 내리고 끝나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누구든 그냥 사람 대 사람일 뿐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는 꼰대도 없고, 개인이 완벽해야 한다거나 다른 누구보다 더 나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이 부담을 내려놓고 모두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들은 보통 사람의 힘을 믿는다. 누구 하나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해결사가 될 필요도 없고 각자가 힘을 합쳐 각자의 몫을 해낸다. 누구 하나 특별히 대단하지 않더라도 각자의 몫을 다하는 사람들의 위대함은 흔히 팀플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인터넷을 보면 누구나 팀플 과제를 떠올렸을 때 제대로 하지 않는 프리라이더 때문에 고생했던 경험이 차고도 넘친다. 그런 경험에서 비추어봤을 때, 특별히 뛰어난 사람보다도 각자 자기 몫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많은 게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선거와 투표도 마찬가지. 결과적으로 한 사람의 좋은 리더가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사회의 시민의 수준이 평등하게 높아야 한다.


그 외에도 겸손함을 미덕으로 여기며 추구하는 이런 사회에서는 자신을 더 드높이고 싶어 하는 이들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 평등함이 나은지 경쟁이 더 나은지 확답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살아가면서 경쟁 속에서 뒤처지는 것 같다는 생각과 나 자신의 능력이 크게 뛰어나지 않음을 느끼게 될 때마다, 나 자신의 작음을 느낀다. 그리고 평범한 한 사람의 몫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음을 배운다.


물론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니까 이왕이면 나 자신이 특별했으면 좋겠지만, 살다 보니 거리에서 스치는 이름 모르는 사람들 모두 나에게는 지나가는 사람일지언정 각자 자기만의 삶이 있고, 그들은 모두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하든 안 하든 어차피 자기 삶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인데 왜 남들과 비교하며 매번 경쟁하듯 살아야 하나? 남들이 행복한 건 자기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거고 그것과 굳이 비교하며 살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타인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답정너'가 될 필요도 없다(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원하는 칭찬을 해줄 때까지 상대방을 짜증 나게 만드는 대화를 의미함. 예시: "너 설리 좋아해? 남들이 나 설리 닮았대, 근데 내가 볼 때는 설리 별로. 네가 볼 때는 나 설리 닮았어?") 타인은 당신의 삶에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특별히 관심이 없다. 내가 잘났네, 네가 잘났네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를 존중해주며 살면 되는 거 아닐까 싶다.


요즘에는 예전만큼 '얀테의 법칙'을 다 따르지는 않는다고 하지만('네이키드 덴마크'에 의하면 심지어 덴마크에서는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보는 '반얀테의 법칙'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북유럽 사람들의 행복 비결은 이 법칙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타인보다 특별히 잘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고 생각하며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데 평화롭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나? 잘나도 못나도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저 사람도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하고 질투나 시기, 혹은 오만함과 같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벗어나 득도한 평화로운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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