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귀를 열고 중간에서 만나요

에어비앤비 호스트와의 대화가 내게 알려준 것

by moka

북유럽 물가가 워낙 살인적이다 보니 호텔비도 일박에 평균 20만 원을 웃돌았다. 현실을 깨닫고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내게 에어비앤비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가격 외에도 에어비앤비의 생각지 못했던 장점이랄까,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면서 외국 현지 호스트와 그 나라의 문화와 사회문제 등을 우리나라와 비교하며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고 좋았다.


특히 노르웨이 오슬로의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는 다른 호스트들과 달리 거의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그래서 짧은 시간을 머물면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날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나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당 근무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매일 집에 있는 호스트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그녀에게 물었던 것 같다. 그랬더니 그녀는 그때 다른 일은 안 하고 이 에어비앤비 호스트만 하고 있다고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노르웨이는 주당 근무시간이 37.5시간인데 정부에서 이를 아주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고 했다. 각 지역별로도 관할해서 감시하고 있고, 그 시간 이상 일을 하면 다른 지역에 가서도 일을 더 할 수 없는 구조라고 했다. 따라서 본인이 원하더라도 초과 근무나 투잡이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너무 많이 일을 하면 다른 사람이 일할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둠 속에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야경은 모두 야근하는 근로자들 덕분이라고 할 만큼 야근이 일상적인 한국에서 온 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하루는 내가 오슬로 시내를 돌아보며 구경하고 와서 노르웨이는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는데 왜 거지가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유럽연합은 아니지만 유럽에 있기 때문에 조약상 루마니아 집시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데 이게 점차 사회문제가 되어가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 역시 생각과 달리 화려하지 않다. 그곳에도 각종 사회문제가 있다. 유로존 내부의 불평등과 난민 문제가 결국 임금이 높고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는 국가 내부로 흘러 들어가면서 사회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선거를 통해 모든 정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그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너희 나라는 그렇지 않냐고 묻는 그들 앞에서 당시 우리나라는 왜 그게 안 되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려워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솔직히 그 호스트가 모든 게 선거를 통해 해결이 가능하다는 소리를 했을 때 나는 그게 가능한가 싶어서 그녀의 말을 듣고 이상향의 세계 이야기라도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와 투표로 정해지고 해결되는 게 맞는데 나는 왜 이런 걸 현실에서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지? 나만 그런가?


부끄럽게도 나는 대학생 때만 해도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원래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특별히 관심이 없었고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보다는 나의 개인적인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투표를 안 한 적은 없지만 정치는 나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친구의 추천인가로 정치학개론을 들었는데 그 수업의 강사는 정치는 인간 삶의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해서 놀랐더랬다. 그의 말마따나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정말이지 정치와 떼어내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흔히 어느 집단이든 그 안에서 뭘 하려면 투표를 통해서 결정을 하곤 한다. 모여서 같이 밥을 먹으러 갈 때도 메뉴 선정을 두고 투표를 한다.


이 선거와 투표라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민주주의 있는 곳에 다수결 있고, 다수결의 다른 말은 투표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사회에서 사는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다수결의 원칙'을 배운다. 한 마디로 쪽수 많은 쪽이 이기는 건데, 이것의 맹점은 그게 옳든 그르든,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게 이긴다는 거다. 다수결 입각 민주주의의 함정은 극우화와 극좌화에 모두 동등하게 정당성을 부여하여 정치는 본래의 목적보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의 형태로 나아간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를 지적하며 '철인(철학자)'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 세상에 과연 완벽한 철인이란 존재하는가 의문이 든다. 그러니 결국 민주주의가 계속되는 한,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시민이 판단을 제대로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한 몸 살아가기도 바쁜 현대인들은 자신과 관련되는 일이 아니면 무관심해지기 쉽다. 아니면 편향된 정보로 판단 내리기 일쑤다.


대학 때 나는 경영학을 복수 전공했는데 경영학에서는 맨날 경영자의 입장으로 가르친다. 그래서 맨날 배우는 게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고 효율성이 가장 중요하다.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뭐 이런 거였다. 노조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고, 어디서 파업한다고 그러면 부끄럽게도 '파업한다니 그동안 제대로 이용 못해서 불편하겠다.' 정도였다.

그렇게 내가 마치 경영주라도 되는 것처럼 경영인의 마인드를 세뇌당하다시피 하며 당연히 경영자처럼 생각했는데 막상 회사에 들어가니 나는 경영자가 아니었다. 나는 노동자였다. 애석하게도(?) 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삼성의 이건희도, 그렇다고 전설적인 창업자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알리바바’의 ‘마윈’도 아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아니다.) 누구도 내게 “너는 커서, 대학을 졸업해서 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물론 한국에서 커리어 루트의 최종점은 치킨집 사장이라지만 그것은 제외하기로 하자). 노동자란 어감이 주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게 프롤레타리아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는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니, 내가 노동자라니?!’


각 직업군으로 나뉘지만 어쨌든 자본가가 아닌 이상에야 모두 다 결국 세분화된 그 직업의 일을 하는 노동자이다. 그런데 노조란 나쁜 것이라고 미디어를 통해 세뇌당하다시피 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노조를 가입하면서도 당혹스러워진다. 특히 노조 교육 때 나오는 노동 운동 노래는 왠지 자기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같이 느껴지게 만든다. 제 아무리 학창 시절에 조세희의 '난쏘공(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 해도, '노동 운동 = 사회주의 = 빨갱이' 같은 극단적 교육의 그늘 하에 살았던 영향으로 노조의 노동운동은 왠지 급진적인 것 같고 파업을 하면 나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이 괴리감이 든다. 우리는 싸우라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싸워서라도 자기 몫을 정당하게 주장하고 쟁취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기보다 시키는 대로 공부 열심히 하고 순종하는 착한 사람이 되라고 교육받는다. 싸우면 안 되는데 직장에서는 나의 권리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고, 이러고 있으면 마치 정신분열이라도 일으킬 것 같다.


‘아 왜 나를 이렇게 피곤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거야?! 알아서 돈도 많이 주고 편하게 해 주면 안 돼?’ 경영자의 입장에서 노동자가 놀면서 돈 많이 받아가는 건 안 된다. 노동자에게 들어가는 돈은 모두 ‘비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대립되는 입장에서 경영자와 노동자는 대부분의 경우에 대립할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인 것이다.


노조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개별 노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이 거대한 우주에서 개미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다 못해 알바를 하다가도 임금체불을 당했을 때 돈을 받기가 힘든데, 거대한 조직을 상대로 하면 개인의 힘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불리한 상황에 놓여도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것처럼 싸움은커녕 혼자서 찍소리도 내기 힘들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 속에 노조가 나쁘게 각인되어 있는 이상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 그들을 비난한다면 당연히 노동자 개개인으로 쪼개져 불리한 것에도 대응하기 힘들어진다. 그리고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싸우려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싸우고 내 권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주말에 나와서 일하라는 말(정확히는 일을 배우라고 했다)에 나는 구시렁거리면서도 나갔다. 한낱 신입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까라면 까는 것뿐. 순종하라는 교육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싫은데요?’하고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대관절 한국 사회에서 거절이 가능한가? ‘거절은 거절한다’가 한국 사회에 암암리에 퍼져 있는 사회생활 룰이 아닌가.


*


북유럽에서 북유럽 사람과 친구가 되면서 가장 놀랐던 것 중 한 가지는 바로 각자 다양한 자기의 정치적 성향을 적극적으로 표시한다는 것이다. 덴마크에서 알게 된 한 덴마크인 친구는 자기 SNS에다가 정치적 성향을 극좌(파) radical left라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태어나서 자기를 극좌라고 표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이전에 한국 사회에서는 ‘좌파’라고 표현하는 것을 상당히 금기시 해왔다(어쩌면 지금까지도 편하게 쓰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걸 보고 ‘이 사람 뭐야?’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지만 누군가의 정치적 성향이 ‘극좌파’라는 걸 본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연스레 북한과 공산당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한국전쟁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니 반공교육도 없었을 테고 그러니 전반적으로 보수화된 한국사회와는 다르게 정치적으로 좀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하기야 극우도 존재하는데 극좌라고 존재하지 말란 법은 없겠지.


이외에도 북유럽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고 정당 가입률이 높다. 어렸을 때부터 정당에 가입해서 정치에 활발하게 참여한다. 그래서 젊은 국회의원들이 자주 눈에 띈다. 다양한 정당들이 고루 활동하며 각자의 이익을 대변한다. 당연히 노조 가입률도 매우 높다. 아니 감히 말하건대,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더 힘들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전교조를 떠올리며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북유럽의 선생님들은 대부분 노조에 가입되어 있고 스스로를 교육 노동자라고 여긴다. 일하고 돈 버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이니, 노조에 가입되어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파업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적극 지지한다. (잘은 몰라도 어딘가에는 싫어하는 사람들도 아마 있긴 있을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즉,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 일하는 사람은 노동자이고 모두 각자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싸운다. 돈을 벌려고 일을 하는 거지 무보수로 봉사를 하려는 게 아니니까.


아무튼 북유럽 사회도 처음부터 일하기 좋은 환경만은 아니었다. 경영진과 노조가 대립하기도 한다. 스웨덴에서는 23년간 총리를 한 타게 에를란데르(Tage Erlander)라는 전설적인 총리가 있다. 그는 45세에서 68세(1946~69년)에 이르기까지 총리로 재임하며 스웨덴을 '국민의 집'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재임 기간 중 전 국민 의료보험, 전 국민 연금 지급, 4주 휴가제, 9년간 무상보육, 100만 호 주택 건설 등을 이뤄내며 국가를 국민을 보호하는 따뜻한 가정인 '국민의 집'으로 만들었다. "그 집에선 누구도 특권의식을 느끼지 않으며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아무리 스웨덴이라고 해서 그의 정책에 반발이 없었을까? 사회민주당 소속인 에를란데르가 집권하자 우파 야당의 대표는 "총리의 계획경제대로 가면 스웨덴이 소련처럼 공산주의 사회로 직행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에를란데르가 추구한 것은 그런 게 아니라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지금처럼 부유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는 경제를 일으키고 복지에 투입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좌파를 적대시하는 자본가 집단, 재계와 대화를 하기 위해 "난 목요일이 한가한데 일단 만나서 얘기합시다."라며 초대했다. 그 뒤에는 "목요일 저녁을 비워놓을 테니 함께 식사합시다."라며 목요 클럽을 만들어 노사정, 여야정 협의를 이루었다. 스웨덴 현대사의 획을 긋는 이 '목요 클럽'은 지방에 있는 총리의 여름 별장에서, 스톡홀름의 특별한 고궁에서 진행됐다. 파업 종식, 임금인상 중단 같은 노조의 협조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재계의 결단도 이루어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사회복지정책 분야의 수업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에를란데르는 사적으로 전혀 만날 일이 없을 법한 사람들을 한 테이블에 모여 앉혔다. 유유상종이라고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구가 되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니 경제적으로 전혀 상황이 다른 사람들이 만날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매주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서로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각자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일단 자기의 이해와 맞지 않는 것에 반대를 하던 사람들의 귀와 마음이 열린 것이다. 아무리 정적 이래도 매주 목요일마다 모여서 저녁을 먹다 보면 그것도 23년을 이야기하다 보면 인간이라면 웬만해서는 정이 쌓이고 말이 통하기 마련이다.


대학 때 김용택 시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신문을 모두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의 균형을 맞춘다고 했다. 북유럽의 '끝장토론'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다소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나는 북유럽 사람들이 젊은이가 어르신과 대등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 같은 대화가 사실 좀 어색했다. 수업에서 교수한테 그러는 것은 물론, 밥 먹는 시간에도 좀처럼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뭐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이런 것은 쌍방을 대등하게 여기는 수평적인 체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윗사람, 웃어른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수직적 체계에서는 윗사람의 잘못을 비판하면 권위에 도전한 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잘못을 하고도 아무도 지적하는 이가 없고, 그래서 통합되지 못하고 각자 고립된다. 결국에 둘이 힘을 합쳐 좋은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는 상황을 놔두고도 그렇지 못하게 된다. 대체로 지킬 것이 많은 쪽이 보수화된다. 나이가 들수록 지킬 게 많아지다 보니 사람은 점점 나이 들수록 보수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히 젊은이들이 대체로 진보적이고 중장년층이 보수화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계급이 세습될수록 젊은 층에도 보수층이 많아지는 상황이 발생하긴 하지만.


정치란 어디에나 존재한다. 각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들이 대립하고 그 중간에서 서로 의견을 조율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들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말할 때도 많은 이들이 오로지 반격할 생각만 한다. 편향된 정보는 늘 편향된 사고로 이어진다. 그리고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며 자기를 반성할 줄 모르는 사고는 남을 통제하고자 한다. 그런 의식을 가진 이들끼리 마주쳤을 때 사회는 갈등으로 가득 차 분열된다. 갈등은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고 완전히 해소될 수는 없겠지만, 분열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두 집단 중 어느 한쪽이 이긴 게 짧게 보면 그쪽의 승리 같지만, 길게 보면 그건 결국 어느 쪽도 이긴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는 다양한 층이 함께하는, 그래야만 돌아가는 곳이니까.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상대가 있어야 자기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경영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노동을 해야 한다. 소수의 자본가와 AI 로봇만 남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대량소비를 주축으로 하는 산업들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반대로 제대로 경영하지 못하는 조직 역시 붕괴되기 일쑤다. 그러니 존재하기 위해서는 싫든 좋든 상대와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양쪽의 의견을 들어보며 갈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배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전히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대화가 아니라 서로 날을 세우며 고성이 오가는 혼돈의 쓰나미에 이리저리 좌지우지되지 않고 현명하게 제대로 중심을 잡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가 극으로 치닫지 않고 서로를 만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마음과 귀를 열고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마음. 누가 대신 만들어주는 미래란 없다. 언젠가는 한국도 노르웨이의 호스트가 말한 대로 선거를 통해 모든 문제가 당연히 해결될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한국에도 빨리 올 수 있기를 빈다.






*스웨덴 에를란데르 총리 이야기는 중앙일보 전영기 논설위원의 '[전영기의 시시각각] 스웨덴 총리 에를란데르의 초대(2016.05.13 일자)(https://news.joins.com/article/20018272)'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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