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곳
기억이 시작하는 7살 무렵부터 서울로 취직해 고향을 떠나던 25살까지 20년 가까이 대전의 한 작은 동네에서 살았다. 그 동네는 반달처럼 길게 생겼는데, 마을 한쪽에는 갑천이 든든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규모가 큰 하천이 길게 흘렀고, 바로 옆에는 걷기 좋은 길과 녹지, 운동기구 등이 조성되어 있었다. 같은 동네에서 아파트를 옮겨 다니며 여러 번의 이사를 할 때에도 갑천은 늘 그 자리에서 나의 놀이터이자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 동갑인 친구가 두 명이 더 있었고, 동생들도 또래였다. 엄마들끼리 친해지니 아이들도 금방 친해져 주말이면 같이 놀러 다니곤 했다. 우리는 종종 먹을 음식을 챙겨 갑천 한 곳에 돗자리를 펴놓고 시간을 보냈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다가 다 같이 식사를 했고, 식사를 마치면 아이들은 또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야말로 푸르른 하늘 아래, 환한 달빛 아래 넓고 안전한 놀이터였다.
갑천은 계절별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었다. 춥지 않은 가을까지는 가족, 친구들과 배드민턴을 치며 땀을 흘렸고, 어린이라면 안 타곤 못 배기는 자전거, 롤러브레이드, 킥보드 등을 신나게 즐겼다. 겨울에 하천이 꽝꽝 얼면 동생과 함께 얼음썰매를 타러 나갔는데, 그러면 지금의 내 나이와 별 차이가 없던 젊은 아빠가 썰매 탄 우리를 양손으로 힘껏 끌어주시곤 했다.
가장 기억 남는 특별한 순간은 2002년 월드컵 때 갑천에 큰 스크린을 설치해 붉은 옷을 입은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경기를 보며, 응원한 장면이다. 그 넓은 장소가 꽉 차게 느껴졌고, 득점을 할 때마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서로를 얼싸안았다. 2002년 월드컵은 우리 국민들을 하나로 만들고 다 같이 울고 웃게 해 줬는데, 정말이지 그 응원 열기가 대단했다. 아직도 어린 시절 벅차고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외모에 민감해진 사춘기 중학생 때는 다이어트를 자주 결심했다. 살 빼는 걸 목표로 저녁이면 갑천에서 친구와 만나 mp3에 담은 신나는 노래를 듣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힘차게 걸었다. 한참을 걸으면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그 시절 갖고 있던 고민과 취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미래를 꿈꿨다.
그러면서 마음속 깊이 한 직업을 꿈꾸게 되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5년 뒤인 20대 초반에는 동네 독서실에서 수험생 시기를 보내며 혼자 갑천에서 달리기를 하며 체력을 쌓았다. 아직도 그 시절 매일 오후 5시부터 한 시간 달렸던 시간이 생생하다. 계절별로 해 지는 시간이 달랐기에 자연풍경은 늘 달랐고, 해 질 녘 노을 풍경이 특히 아름다웠다. 추운 겨울날에도 한참을 달리고 나면 땀이 흘러 추운지도 몰랐다. 불안함, 간절함, 희망, 절망 등의 감정들이 뒤섞인 상태로 숨이 찰 때까지 뛰다 보면 머릿속이 비워졌고, 다시 공부할 힘을 얻어 어두운 독서실 자리에 앉아 저녁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학창 시절과 수험생활까지 보낸 정든 동네였지만, 25살 서울로 취직을 하게 되고, 이후 본가도 엄마 회사 근처로 이사를 가면서 20년을 살던 그 동네를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떠나기 전 본가에 가면 갑천에서 걷곤 했는데, 우리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대규모 신도시로 이사를 많이 가서 그런지 산책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저녁 가로등도 전체적으로 어두워졌다. 어렸을 적 뛰어놀던 내 또래 아이들은 성장해 서울로, 도심지로 독립해 떠났다. 여전히 갑천은 낮에는 아름답고 드넓은 자연 풍경이, 저녁에는 멀리 보이는 아파트 불빛이 만든 멋진 야경을 지녔지만, 우리 가족을 포함한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떠나간 듯하다.
서울에 올라와 4번의 이사를 하며 8년째 살다 보니, 어린 시절 당연하게 누렸던 갑천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달았다. 물이 흐르면서도, 녹지가 가득하고,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드넓은 곳.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함께 또는 각자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곳. 한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고, 가로등이 밝아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곳. 오랫동안 머물러서 추억이 켜켜이 쌓인 곳. 갑천은 나에게 고향과 같은 의미이다. 앞으로 살다가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기차표를 끊고 한달음에 내려가 나의 고향 갑천으로 숨어봐야겠다.
훗날 나도 아이를 낳고 기르게 된다면, 내가 살았던 동네처럼 작지만 정겨운 곳, 갑천처럼 물이 흐르고 녹지가 풍부해서 계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 주변에서 오랫동안 정착해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