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소년이 되었다
신해철이 대학 가요제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하고 타이거 CF에 나오며 아이돌 스타로 자리 잡을 무렵, 나는 신해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 싫어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신해철이 데뷔할 무렵 나는 '황인용의 영 팝스'에 미쳐 있었으며, 조금 어렵지만 전영혁의 심야 방송까지 즐겨들을 정도로 팝 음악에 빠져 있었으며, 당시 퀸을 비롯한 록 음악뿐 아니라 아이언 메이든, 디오 같은 헤비메탈 그룹이 추구하는 음악만이 진정한 음악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대학 입학 후 격동의 시기를 거친 뒤 다시 복학했던 94년, 신해철의 앨범 발매 소식이 들려왔다. 넥스트의 세 번째 앨범인 'The world'를 소개한 내용이었는데, 성수대교와 삼풍아파트 붕괴를 정면으로 다룬 음악이라는 점에 이끌여 들어보게 되었고 그 이후 'The being'를 비롯해서 'The home' 같은 넥스트의 앨범은 기본이고 무한궤도와 솔로 음반까지 하루하루를 신해철과 함께 보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하던 시절 그의 음악은 나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1997년 1월부터 뉴스를 만들게 되면서 그의 음악을 리포트 배경으로 자주 사용했다. 가장 많이 썼던 것은 '정글 스토리' 음반에 있는 '그저 걷고 있는 거지'였고 두 번째로 많이 쓴 음악은 '아버지의 나'이다. 둘 다 연주 부분을 주로 사용했는데 온전히 내 생각이었지만 스포츠 뉴스에서 감동적인 느낌을 주기 위한 의도가 나름대로 전달된 선곡이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폴란드, 미국 , 포르투갈과 같은 조에 편성되었는데, 조 추첨 결과가 나오고 얼마 뒤 나는 같은 조에 속한 나라의 음악을 비교하는 뉴스를 제작했다. 폴란드는 당연히 쇼팽, 미국은 팝 음악, 포르투갈은 파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노래를 선곡했다. 그럼 우리나라는? 나의 선택은 신해철이었고, 무주 유니버시아드에서 연주한 넥스트의 '아리랑'을 사용했다. 당시 뉴스에서 보기 힘든 아이템 및 제작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신해철은 KBS 스포츠의 음악을 작곡하게 되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특집 내레이션을 위해 KBS 스포츠국에 들렀고, 그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후에도 그의 콘서트 장에 여러 차례 갔지만 사진까지 찍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014년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이 한창일 무렵 목동 야구장에 있었는데, 경기가 끝날 때쯤 기자실에서 신해철이라는 이름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뜬 것이다. 얼마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한 때문인지 생각보다 담담했다. 다음날 아산병원 장례식장 2층에서 조문을 하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전했다. 그날 저녁 '신해철의 음악이 스포츠에 남긴 것'을 주제로 스포츠 뉴스를 만들었다.
'대한민국'과 'FC서울 응원가', 오승환의 등장곡이었던 '라젠카', 이승엽의 신인 시절 별명이었던 '얄리'
무주 유니버시아드 연주곡 '아리랑' 그리고 'KBS 스포츠 타이틀' 음악까지 소개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오마주를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스포츠 뉴스에 담았다.
2018년 유소년 축구 취재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고, KBS 9시 뉴스를 통해 '평양-서울' 생방송을 진행했다. 10년 만에 재개된 '평양-서울' 생방송 이후 취재 뒷이야기를 전할 때 '평양-서울 생방송에 성공할 확률은 동전을 던져 앞면이나 뒷면이 아닌 동전을 세워질 정도의 희박한 확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신해철이 예전 영화 음악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하면서 썼던 표현이다.
2022년 지난 25년간의 기자 생활 경험을 그대로 녹인 책 '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을 발간했다. 책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해철의 노래를 듣는 어른은 소년이고, 신해철의 노래를 듣는 소년은 어른이듯, 고시엔을 보는 소년은 어른이고, 여전히 고시엔을 사랑하는 어른은 소년이다.'
정말 고맙게도 youngseok_story 님이 인스타그램에 서평을 적어 주셨는데 내가 쓴 문장에 현실적인 경험을 보내 더욱 완성도 높은 문장을 만들어냈다.
'신해철의 노래를 듣는 어른은 소년이고, 신해철의 노래를 듣는 소년은 어른이듯, 고시엔을 보는 소년은 어른이고, 여전히 고시엔을 사랑하는 어른은 소년이다.'-한성윤 '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 중-
딱 일주일 전 잠실야구장! 야구를 보며 방방 뛰었다. 그렇게 나는 소년이 됐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음악은, 그가 남긴 말들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남아 여전히 가슴 뛰게 만든다. '청춘, 여름 , 꿈의 무대 고시엔' 에는 DVD의 이스터 에그처럼 신해철의 어록과 연상된 표현이 몇 개 더 있다. 누군가 이것을 찾아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