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복수 나답게 살아가기

by dreamer

디자이너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에게 생기고 자부심이 었다. 처음 넥타이 하나를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 머플러에 스며드는 색의 조화, 나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작은 변화들이 사람들의 하루에 멋을 더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무한한 동기를 줬다. 20년 넘게 나는 남성 액세서리를 디자인해왔다. 넥타이, 양말, 머플러, 손수건, 벨트. 수많은 작은 조각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상을 만들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항상 존재해왔다고 생각 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의 손끝은 무거워졌고, 머릿속은 흐릿해졌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메말라 갔다. 회사는 여전히 돌아갔지만, 의미 없는 회의에 존중이 없는 상사에 나는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걸어갔지만 나는 이렇게 자존감 없이 대우받지 못하면서 일해야하는 이유가 없었다. 그냥 멈춰 서 있었다. 멈춘 나를 돌아보며 처음엔 그저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좀 쉬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마음이 아팠고, 그 아픔은 몸으로도 번져왔다. 회사 건물만 봐도 심장이 떨리고 숨이 박혀왔다. 결론이 나지 않는 회의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나는 쉬고 있다. 그 어떤 작품도, 디자인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처음엔 단순한 휴식이치유의 시간이라 여겼지만, 점점 나는 이 시간이 치유가 아닌 버티기처럼 느껴졌다. 내 안에서 원망이 피어났다. 왜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웠을까. 왜 나는 그저 성실히 일만 하며 살아왔을까. 왜 아무도, 아니 내가 나 자신조차 그 아픔을 몰랐을까. 나만 이렇에 아파야 하는가.


회사를 향한 감정도 뒤섞였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팀을 위해, 브랜드를 위해 살아왔는데, 정작 힘들어진 지금 나는 혼자였다. 알아주지 않는 세상, 무관심한 사람들. 그런데 사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나를 몰라줬던 것 같았다. 아프다고 말하는 내 안의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일만 했던 나. “이 정도쯤이야,” “조금만 더 버티자,” “이 일만 끝나면 괜찮아질 거야” "다른 사람들도 다 힘들게 살아" 라고 수없이 타이르던 내 안의 목소리들이 이제 와서 후회로 돌아왔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한 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났다. 처음에는 “곧 나아질 거야”라는 희망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마음에 실망도 커져 갔다. 때로는 침대에 누워 ‘내일 아침엔 그냥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몸이 너무 무겁고, 하루가 너무 길고, 외출조차도 겁이 나던 날들이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게 어떤 날은 너무 막막했다.


책도 읽어보고, 긍정적인 말을 따라해보기도 했다. “괜찮아질 거야,” “지금은 잠시 멈춘 거야,”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그 말들이 틀리지 않다는 건 알지만, 내 마음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어떤 날은 정말로 그 말들이 위로가 됐지만, 또 어떤 날은 “그게 그렇게 쉽게 되면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반감만 들었다. 병원을 다니는것 약을 먹는 것 모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무 의미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지금의 이 아픔이 언젠가 내 작업에 담길 수 있을까. 내가 겪은 이 어둠이, 누군가의 삶에 조심스러운 빛으로 전해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조금은 품는다. 아직은 너무 아프고, 너무 힘들지만, 언젠가는 이 모든 걸 견딘 나 자신이 내가 만든 무언가를 통해 다시 웃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알고 있다. 다시 멋을 입고, 다시 거리로 나가 웃고,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걷는 것이야말로 이 모든 상처에 대한 가장 통쾌한 복수라는 것을. 다시 창작하고, 다시 나만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이기는 길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힘들다.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그 길로 나아가는 내 걸음이 너무 느리고 때로는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믿어보려고 한다. 나의 속도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나를 알아주지 않았던 세상과 나를 원망하는 대신, 이제는 나를 조금씩 안아주기로 했다. 서툴더라도, 느리더라도. 지금 이 시간을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줄 것이라는 희망을 다시 품어보려 한다.


나는 여전히 디자이너다. 디자인은 내 일이기도 했지만, 내 삶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젠가, 이 아픔마저도 내 안의 새로운 패턴이 되어 나만의 색깔로 피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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