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함께 도서관에 다니는 친구가 생겼다, 중학교 3학년 때에서야. 경기도 변두리였던 우리 동네에는 학원이 드물었다. 학교가 파하면 친구들끼리 놀러다니는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와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리곤 했다. 당시 중․고등학교에서 제시한 필독서는 주로 외국 고전문학이었다. 『좁은 문』, 『데미안』, 『노인과 바다』, 『죄와 벌』, 『부활』 같은 작품들. 유럽이나 미국, 러시아의 소설들이었다.
그러나 외국의 역사를 모르니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와닿지 않았다. 낯선 인물들의 이름조차 익숙하지 않았고, 그들의 감정을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공감이 되기보다는 멀어져만 갔다.
대신 한국 소설을 찾아 읽었다. 박완서, 오정희, 임철우, 이문열, 이청준, 윤흥길 등. 6·25 전쟁 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들의 소설 속에는 한국의 역사적 현실과 삶이 있었다. 여성 작가의 작품은 양공주들의 비참한 삶, 여성으로서의 겪는 차별 등을 담고 있었다. 남성 작가의 소설 속에는 독재정권의 폭력, 가난한 소시민의 비굴함이 녹아 있었다.
특히 임철우의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좋아했다. 이 소설은 낙일도 사람들의 삶을 다룬 연작소설로, “모든 인간은 별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우리는 한때 별이었고, 죽어서 다시 별이 된다는 문장을 읽으며 비로소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 책의 말미에는 이창동 소설가가 쓴 ‘작가소묘: 영혼을 두드리는 따뜻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훗날 영화감독이 된 그는 이 글에서 임철우 작가와의 인연을 풀어두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는 1993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박광수 감독 연출 아래 당시 조감독이던 이창동이 각색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나만큼이나 이 소설을 사랑했나 보다.
한국 소설은 내게 낯설지 않았다. 그들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기도 했다. 책 속 인물들이 나와 같은 질문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었다. 독서는 ‘위대한 문학’을 탐독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도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독서의 폭은 더 넓어졌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에 깊이 빠져들었다. 열 권이 넘는 책을 읽는 동안,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개인이 겪는 고통과 선택을 마주했다. 문학이 시대와 역사를 담아내는 그릇임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대하 장편 역사소설도 베스트셀러가 되던 시절이었다. 조정래 작가가 인근 서점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작품 속 인물들처럼, 작가님은 강인하고 직설적인 어조로 말하는 분이셨다.
한국문학사에도 관심이 생겨 문학사 관련 책들을 읽다가 홍명희의 『임꺽정』을 접했다. 우리말의 힘을 살리면서 민중의 삶을 재현한 작품이었다. 판소리의 말맛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이 인상 깊었다. 『임꺽정』을 읽으며 국문학에 더욱 매료되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국어국문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교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바람과 절충해 국어교육과를 선택했다. 아쉬움이 남았으나, 대학에서 뜻밖의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명희 연구자인 교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교수님은 고등학교 때 『임꺽정』을 읽은 나를 각별히 대해 주셨다. 국어교육과인 만큼 교사가 되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소설 그 자체를 깊이 좋아하는 학생은 드물었다. 그래서 내 독서 이력이 교수님의 눈에 남았던 것 같다. 수업에서 『임꺽정』의 일부를 발표 과제로 맡았을 때, 다시 작품 전체를 읽으며 흐름을 붙잡으려 애썼다. 교수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문학을 잘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얻었다.
읽을 것이 귀했던 시절, 나에게 독서는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는 일이었다. 책의 앞날개에 실린 작가 소개, 뒷날개에 붙은 출판사의 책 광고, 책의 가장 앞장이나 가장 뒷장에 달린 서지사항까지 읽었다.
출간 연도와 쇄수를 보며 이 책이 언제, 얼마나 읽혔는지 짐작하는 것도 재미였다. 앞날개는 작가에 대한 애정이, 뒷날개는 나의 독서 목록이 되어주었다.
작가의 말은 그 작가의 내밀한 속마음을 보여주는 창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작가의 말을 가장 주목해서 읽는다. 작가의 말에 울림이 있으면, 작품 역시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소설의 말미에 실린 평론가의 해설이 나를 사로잡았다. 소설만 읽을 때는 이해되지 않던 부분이 해설을 통해 납득이 되었다. 나는 평론가들의 독법을 따라가며 안목을 키웠다. 텍스트를 해석하고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그런 경험은 문학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꿈으로 이어졌지만 되지는 못했다. 평론은 이론의 엄격함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치밀하게 읽는 습관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학생들에게 정독을 강조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이는 시도는 여전히 즐겁다. 지금도 문학평론가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형체를 달리하며 내 안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그 꿈은 지금의 나를 만든 원형이다. 별빛처럼 멀어졌다가도, 언젠가 다시 닿을 수 있는 빛으로 남았다.
*다음 화 예고*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대학에 입학하여 만난 기독교 동아리와 책 이야기를 합니다.
– 6장. 기독교 동아리와 책 ― 공동체와 질문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