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문방구는 언제나 북적였다. 준비물 때문이라기보다는 엽서와 편지지 때문이었으리라.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마음을 전할 방법은 손편지뿐이었다. 당시 여학생들은 편지로 자신의 마음을 적어 전하는 일이 흔했다.
내가 다녔던 ‘경화여자중학교’에서는 아침 자율학습 시간에 3학년 학생회 언니들이 1학년 반에 들어와 조용히 공부하도록 지도했다. 10대 땐 누구라도 동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병에 걸리는지 학급에 들어오는 언니들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현재의 청소년들이 아이돌 가수나 배우들을 동경하는 마음과도 흡사했을 마음이다.
나도 1학년 때 우리 반에 들어오던 3학년 학생회 언니를 좋아했다. 언니에게 엽서를 쓰기 위해 고르고 또 골랐었다. 엽서엔 좋은 글귀가 적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글귀들 가운데 상당수는 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엽서를 통해 시를 만나고,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1학년 내내 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여러 편의 시와 인연을 맺었다.
1년이 지나 언니가 졸업하자, 교회 오빠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잘생긴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농담을 잘하고 사람을 웃게 하는 데 능숙했다. 웃을 일이 드물던 나에게 그의 유머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고백을 결심하며 다시 엽서를 고르러 갔다.
수많은 엽서 더미 속에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발견했다. 그 시는 내 마음을 대신 말해주었다.
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Ⅱ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이 시를 읽고 또 읽던 어느 날, 나는 엽서에 시와 함께 고백의 글을 적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오빠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동네에서 미모로 유명한 친구에게로. 당시 교회에 다니던 남학생들 대부분이 그녀를 좋아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인생에서 미모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어차피 미모로 돋보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대신 ‘똑똑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받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욱 열심히 책에 매달리게 되었다. 짝사랑의 아픔은 오히려 시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중학교 2학년, 같은 반에 있던 친구를 부러워했다.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온 그녀는 김영랑의 시처럼 순수하고 서정적인 문장을 쓸 줄 알았다.
교사들이 기대하는 ‘순수한 마음’이 그녀의 글에 담겨 있었다. 직설적인 표현 아래 슬픔이 가득했던 내 글과는 비교가 안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친구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시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친구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다리가 되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산기슭에 자리한 교정에는 낙엽이 가득했다. 걸을 때마다 낙엽이 밟혀 바스락거렸다. 햇살이 반짝이고 낙엽이 흩날리던 날, 친구가 먼저 말했다.
“우리, 낙엽 위에 시를 써서 서로에게 주는 거 어떨까?”
교정을 거닐며 예쁘게 마른 낙엽들을 골라 집으로 돌아갔다. 낙엽 위에 흰 수정액으로 글씨를 썼다. 예쁘게 쓰이지 않아 버리는 낙엽들이 많았지만, 결국 완성했다. 슬픔이라곤 경험해 본 적 없는 소녀 같은 친구와 어울릴 시를 골랐다.
아마도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과 비슷한 시였을 것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 /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낙엽 위의 흰 글씨는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지만, 친구에게 조심스레 건넸다. 그녀가 내게 어떤 시를 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친구의 귀엽고 깜찍했던 손글씨와 함께 어울리는 시였을 것이다. 친구와 시를 나눈 경험을 통해 처음으로 깨달았다. 시는 혼자 품고 있는 언어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건네는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중학교 3학년이 되자 방학이면 서울 큰집에 며칠씩 머물렀다. 큰집에 가면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나 종각의 영풍문고 같은 대형서점에 갔다. 갈 때마다 설렜다. 동네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는 책들의 규모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책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주머니가 가벼웠던 나는 얇고 값싼 시집을 골라 들었다. 그때 산 김소월 시집은 지금도 책장에 있다.
김소월 시인하면 누구나 떠올릴 「진달래꽃」도 좋았지만, 내 마음에 깊이 들어온 건 「못 잊어」였다. 고백은 거절당했지만, 매주 교회에서 마주쳐야 했던 오빠를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 시는 후회와 미련이 얽힌 감정을 대신 표현해 주었다. 혼자 시를 읊조리며 마음을 달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우리다.
그러나 또 한편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김소월의 시집을 자주 펼치며 반복해서 읽으며 해설도 꼼꼼하게 읽는 습관이 생겼다. 요즘에도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책 뒤에는 평론가들이 쓴 해설이 실려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해설들을 읽으며 문학을 분석하는 방법을 배웠다.
김소월의 시를 읽으며 그의 불행한 삶까지 알게 되었을 때, 묘한 위안을 느꼈다. 김소월에겐 일본인에게 폭행당해 정신 이상에 시달린 아버지와 아들에게 지나치게 기대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14살 때 할아버지의 권유로 원치 않는 결혼을 했던 김소월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시 속 그리움의 대상이 정확히 누군진 알 수 없지만 아내는 아니었을 테니. 소월은 경제적인 어려움(혹은 일제의 감시)으로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그의 불행을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하는 마음은 불운에서 출발하며 나 또한 그런 삶을 살고 있기에 문학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란 증명이라도 받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당시의 내가 김소월, 김영랑, 윤동주 같은 일제강점기의 시인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마음의 바닥에 깔린 슬픔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입시의 압박이 심해졌을 때도, 아무도 시킨 적이 없는 시 암송을 하며 버텼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할 때마다, 그 시를 통째로 외우고 되뇌었다. 학교 교정의 벤치에 앉아서, 혹은 하굣길 버스 창밖을 보며 혼자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시구들은 마음의 그림자를 어루만져 주었다.
지금도 새벽 3시,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시간이면 시를 찾는다. 시를 필사하며 스스로를 달랜다.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서가 아니다. 시의 추상적 언어가 상처를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시가 건넨 위로는 늘 이상했다.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방식이 나를 치유했다.
나는 바란다.
누군가에게도 시가 위로가 되기를.
*다음 화 예고*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10대 시절, 문학이 어떻게 나의 꿈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 5장. 문학, 나의 꿈이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