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가 없어도 괜찮은 삶
‘아이를 낳지 말아야겠다.’
10대 때부터 생각했다.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었고, 인구 증가가 인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좋은 부모는 아이에게 따뜻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정서적 안정도 필요하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경제력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에는 흔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밀레니엄 시대가 가까워지던 대학 시절, 출산과 관련해서 동아리 동기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동기들은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믿었다. 누구는 결혼하지 않고 아이만 낳겠다고도 했다.
그러니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생각은 이해받기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형편과 무관하게 자식은 사랑으로 키우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환경오염이나 지구온난화에 대한 심각성이 대중적으로 공유되던 시절도 아니었다.
꽤나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는지, 읽기도 쓰기도 모든 것을 멈추고만 싶었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는지 나도 잠시 흔들렸다.
“혹시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부인과에 가서 산전 검사도 받았다. 남편에게도 검사를 권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아이를 원하는 남편이었기에 이해가 되진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남편의 지인들이나 가족들 중에는 난임 부부가 없어서 자연 임신이 쉽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결국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남편과의 갈등이었다.
남편은 평일 내내 퇴근이 늦었다. 신혼 초부터 기대하는 바가 서로 달랐기에 다툼도 잦았다. 남편이 말했던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집안일을 잘하는, 알뜰하면서도 소박한 가정주부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헌신적인 어머니를 닮은 아내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요리를 즐기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4남 1녀 중 둘째였던 아버지는 고등학생 때부터 아프셨던 어머니를 도와 주방일을 하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매일 자신이 만든 요리를 ‘맛있다’며 먹는 가족들을 보면서 기쁨을 느꼈던 분이다.
돌이켜보면 ‘요리’만 즐겼던 아버지가 과일 깎기나 다림질까지도 해 주셨던 이유는 나와 새어머니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에 입학함과 동시에 경제적으로 독립했으니 돈 버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요리하기보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고, 다림질을 하기보다는 세탁소에 맡겼다. 오래 자취를 했던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은 나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신혼 초에는 ‘가정주부’의 삶을 흉내 내어 보았지만, 이내 포기했다. 남편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해놓고도 바쁜 일이 생겼다며 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잦았다. 평일에는 잠만 자고 나가는 남편을 위하기보다는 10년 이상 길들여진 원래 생활패턴으로 돌아갔다.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다. 서로가 다른 세상에서 자라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시어머니의 장례식 때였다.
결혼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시어머니가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남편과 크게 다투었다. 굳이 밤을 새워야 할 이유도, 3일장을 치러야 할 이유도, 머나먼 장지까지 가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일은 꽤 오래 파장을 남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남편은 처음으로 겪는 상실감을 주체하지 못해 많이 힘들어하기도 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돌아가신 분이 시어머니였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였어도 비슷했을 것이다.
남편은 내게 “당신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다를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남편은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몇 년 후 진짜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나를 보고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죽음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던 나는 장례식의 절차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태도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돌아가신 분은 천국에 계시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 장례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기일에도 추모하지 말고 평소처럼 살자.”
우리 집의 가풍이다. 아니. 아버지의 가치관이다. 그 누가 돌아가셨대도 아버지는 한결같은 말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일도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의 생각이 문제라고 느낀 적은 없다. 경조사는 간소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결혼식을 하지 않은 이유도 ‘식’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겐 당연했지만, 남편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보편적인 사람들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이상한’ 집안에서 자랐는지 몰랐다. 우리는 가풍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와그작 깨지는 순간이 결혼이다. 몇십 년을 쌓아온 버릇이나 습관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철저히 실감하게 된다. 신혼 초에 가장 많이 싸우는 이유일 것이다.
진지하게 이혼을 생각했다. 이혼의 절차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면, 남편이 이미 한 번 이혼을 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철저히 혼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더라면. 그 모두의 이유로 혼인 생활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내가 다시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돌아가야 했다.
평생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기를 소망했다. 읽기는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히고, 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돌본다고 믿어왔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삶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나아가는 자신을 꿈꿔왔다.
다시 배워야 했다. 공허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한겨레문화센터와 엑스플러스 등에서 글쓰기 강좌부터 수강했다. 수업 시간에 썼던 몇몇 글은 오마이뉴스의 기사가 되었다.
‘읽고 쓰는 모임’도 만들고 소설 합평 모임에도 참여했다. 같이 모여 책을 읽은 감상을 나누거나 글을 썼다. 각자의 글을 읽고, 합평도 했다.
그때 쓴 몇몇 글로 두 군데 공모전에도 도전했다. 그 두 군데의 공모전에서 작은 상을 받았다. 좀처럼 하지 않았던 공모전에 참여했던 이유는 내가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소소한 수상이었지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은 되찾을 수 있었다.
읽기와 쓰기는 나를 다시 살게 했다. 왜 아이가 없는지 의아스러워하는 시선에도 맞서게 했다. ‘딩크족’이라는 신조어가 버젓이 있어도 우리 세대에 아이가 없는 기혼자는 드무니 어딜 가도 낯설어하는 표정과 만난다. 심지어 가르치는 학생들조차도.
타인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도 ‘이상한 사람’인 스스로를 읽고 쓰기에 비추며 괜찮아졌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결정이 오히려 상식인 현재에 이미 도착하게 했고, 경조사를 간소히 하는 시대의 흐름을 미리 경험하게 했다. 읽기가 비추는 시야가 더욱 넓을 것을 알기에 더 많이 읽어야겠다고도 다짐했다.
더 넓은 시야가 더 깊은 글을 가능케 할 것을 알기에.
*다음 화 예고*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독서모임을 만들고 함께 읽었던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14장. 독서모임 아름, 읽고 쓰는 삶과 직업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