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이야기#2] 내가 만난 사람들

다정한 사람들

by 윤혼자

성수기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면서 지난 2주간 너무나 바쁜 날들이었다. 고작 여덟 시간의 노동 뿐인데도 온몸은 기진맥진하기 일쑤여서 맥주를 참을 수 없다. 고된 몸을 이끌고 편의점에서 맥주 한캔 사서 바닷가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오늘을 돌이켜본다. 아, 진짜 열심히 살았다. 저 앞에 보이는 연인들과 아이들, 부모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보고 있자면 이상하게도 이런 삶이 제법 괜찮다고 느낀다. 저들에겐 이곳이 여행지겠지만 내겐 일터가 됐는데도 아직까진 모든 것이 충만하다.


땀에 절은 채 바로 앞 바닷가로 걸어가 양말 벗어버리기, 자근자근 모래 밟기, 잔잔한 파도가 올 때를 기다리다가 발 담가보기. 한 손엔 맥주를 들고 차츰 저물어가는 석양을 기다리기. 이거면 됐다. 그래, 이거 하려고 여기 온 거지. 퇴근 때마다 내게 주는 보상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 일, 꽤 오래 할 것 같다.


엊그제인 금요일도 마찬가지로 퇴근 후 바닷가에서 맥주 한캔 할 요량이었다. 늘 가던 편의점에서 500ml짜리 캔 하나를 샀다.


"오늘은 더 힘들었나보네~"


아주머니가 말을 붙인다.


"아, 오늘 진짜 손님 많았어요! 그래도 내일 쉬니까 오늘은 큰 거 마시려고요."


"좋겠다~ 나도 쉬는 날 있고 싶다~"


"에이, (앞치마에 붙은 명찰을 보며) 점장님이시면 사장님인데 제가 뭐가 부러워요."


"나도 그냥 직원 하고 싶어요. 휴~"


아무리 내가 서비스직으로 카페 일을 하고 있어도 성격상 내가 방문한 편의점이나 카페, 식당에서 점원에게 말을 붙이는 편은 아니다. 지난 14년간 서울에서 살면서 한번도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걸어본 적이 없다. 자주 가는 동네 단골집이어도 필요한 말만 했던 것 같은데. 서너 번 정도 방문한 내게 말을 걸어오는 인상 좋은 편의점 아주머니 덕분에 괜시리 기분 좋아져버려.


다른 때였다면 좀 더 오래 머물렀겠지만 이번엔 맥주 한 캔만 하고 버스를 타고 동네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한 번 갔었던 냉삼겹살 집을 다시 갈 요량으로.


"안녕하세요~ 삼겹살 두개 주세요~"


사장님 혼자 하는 가게인데 맛이 아주 좋다. 진짜 동네 맛집. 사장님이 혼자 하시느라 때마다 지인 분들이 서빙을 도와주시곤 하는 것 같은데 이번엔 지난번과 다른 분이 반찬 세팅을 하시더니 내 앞에 앉는다(?)


"어머 이 언니는 왜 혼자 와서 먹고 그래~ 이쁘게 생겨가지고는. 시집은 갔어?"


오늘 처음 뵀는데, 이 무례한 다정함은 뭘까?


"저번에도 왔어요. (주방 안쪽에 있는 사장님을 향해 인사하며)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도 혼자 왔어? 그니까 왜 자꾸 혼자다녀. 몇 살이야?"


이번엔 주방에 있던 사장님이 나오시더니 대신 대답하신다.


"어머 이쁜 언니 또 왔네~ 이 언니 한두 달 전에 이사왔대. 저번에도 잘 먹고 갔어."


여전히 내 앞에 앉아 계시는 서빙 아주머니에게 이번엔 내가 물었다.


"몇 살처럼 보이는데요?"


"스물여덟? 일곱?"


"저 나이 많아요. 그리고 시집은 가서 뭐해요. 자식 걱정 안 하고 남편 밥 안 차리고 얼마나 좋아요. 이렇게 혼자 맛있는 것도 마음껏 먹고."


"어머, 웬일이야. 진짜 어려보인다, 언니~ 아유 정말 우리 딸도 시집을 안 갔어. 왜들 그러나 몰라. 근데 보기 좋다~"


"아주머니는 사장님하고 자매세요?"


"아냐 우리 친구야 친구."


"사장님 연세가 일흔 하나라고 하셨는데 50대로 보였었는데, 여사님도 엄청 젊어보이세요."


처음 뵙는 분이 내 앞에 앉아 이렇게 무례한 질문을 해도 다정할 수 있다니. 괜시리 내 진짜 외할머니가 된장찌개에 다정함 한 스푼 추가해서 밥 차려주신 느낌이랄까. (외할머니는 더 무례했다.)


밥을 다 먹어갈 즈음엔, 밥도 볶아주시고 (원래 안 볶아주신다) 볶음밥 값도 안 받으시고, 후식으로 과일까지 내어주셨다.


"언니 또와~ 이제 이쁘니 언니라고 부를게~"


"네 이쁘니 여사님 다음에 또 올게요~"


배가 터질 정도로 먹고선 집으로 걸어갔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캔 더 샀다. (맥주 마실 배는 남아 있음)


"이제 퇴근해?"


"아뇨~ 저쪽 삼겹살 집에서 밥 먹고 왔어요."


이번엔 펀의점 사장님이다. 부부가 함께 하시는데, 여사장님은 편의점에 상주하며 아침 일곱 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홀로 계신다.


"맛있었겠네. 여기 순댓국집 오픈했더라. 아들이 교동에서 하고, 엄마가 차린 거래. 맛 괜찮대."


"아 집 바로 앞에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다음에 가봐야겠어요."



분명 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온지 고작 두 달밖에 안 됐는데. 서울에서 14년간 '아는 사람'이라고는 회사 동료와 집주인 내외분들밖에 없었는데 언제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아졌지? 그간 만난 친구 리스트를 소개해보겠다.


1. 부동산 양* 아저씨 (부동산 계약 전부터 너무 자주 만나서 여섯 번은 본 것 같다. 일자리 잡으면 근황 알려드리기로 했는데 바빠서 아직 못 감)

2. 인테리어 석* 아저씨 (아파트 소장님이랑 같이 대관령 구경 시켜주시고, 야생화 탐방도 같이 해주셨음. 만날 때마다 연애 좀 하라고 닦달하심)

3. 아파트 관리소장님 ( 석* 아저씨랑 친해서 셋이 대관령 구경하고 야생화 구경함. 같은 동 살아서 만날 때마다 예쁘게 웃어주심)

4. 집앞 편의점 부부 사장님 (집 들어가기 전에 늘 들렸더니 자녀분들, 사는 집, 어제 있던 일 등을 나누며 베프가 됨)

5. 삼겹살집 사장님 (이쁘니 언니 또 오라고 문 앞에 나와서까지 마중해주심.)

6. 포차 사장님 (집앞 실내포차인데 벽에 걸린 시집들이 상당히 좋은 것들이어서 대화하다가 친해짐. 국어교사인 아드님이 선정했다고 함.)

7. 직장 근처 편의점 사장님(퇴근 때마다 매일 들르긴 하지만 들르지 않을 때에도 인사드려야겠다.)


사람이 지긋지긋해서. 실망과 배신, 떠나간 이와 상처 준 이, 징그러운 인간관계가 싫어서. 지겨운 지하철이 싫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꽉 막혀서 듣는 남의 숨소리가 징그러워서 왔는데 이렇게 또 쉽게 좋아해도 되는 걸까. 사람을? 마음을 주고 눈을 마주치고, 그냥 어제 있던 소소한 일 같은 거 나누어도 괜찮은 걸까.


스스로 다시 경계하길, 적당히 하길, 선 꼭 지키길, 선 이상으로 과해지지 않길, 마음 다 내어주지 않길, 친절을 고스란히 받지 않길, 진심을 다 주지 말길. 잠들기 전 다짐해보기도 한다.


만나면 또 하나같이 따뜻해서 마음 못 숨길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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