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열린 문

그리고 열린 마음

by 드리머소녀

평일 오후, 남편이랑 둘째 아이랑 점심밥을 차려 먹고 지하실에서 놀고 있는데 낯선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Hello? Yes. Oh, yes..."


전화를 받은 남편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 지하실 출입문을 탁 닫았다.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는 걸로 봐서 분명 어딘가에서 전화 인터뷰 요청이 갑자기 온 것 같은데... 둘째 아이와 놀면서도 온 신경이 남편에게 쏠려 있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잘해, 남편!'


30분쯤 지났을까 남편이 내려오더니, 얼마 전 지원했던 집 근처 회사에서 연락이 온 거고 중간 관리인쯤 되는 사람과 전화 인터뷰를 한 거라고 했다. 작은 사업체의 대표님을 도와 행정, 관리, 영업 등 잡무를 담당할 실무진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전화 인터뷰를 마치고 인터뷰어는 남편이 상당히 맘에 들었는지 당장 이틀 후에 대표님과 대면(in-person) 인터뷰가 가능하냐고 물었고, 남편은 오케이 했다고 했다. 도무지 무슨 업무를 하라는 건지 감도 잘 오지 않는 일을 덥석 시작하는 게 맞을까, 이 정도 급여로 과연 이 동네 월세가 감당이 될까, 고민하던 남편의 등을 이번엔 내가 슬쩍 떠밀었다.


"그래도 사무직인데 코스트코보단 낫지 않겠어...?"


사고의 출발점은 항상 코스트코였다. 바닥을 한번 제대로 찍고 보니 그것보다만 나으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편도, 나도 결정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라는 이민 선배들의 말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던 거다. 이틀 후 남편은 그 사업체의 대표님과 만나 인터뷰를 했고, 그다음 주 월요일부터 바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남편 만세! 시카고 외곽의 작은 사업체, 그곳이 바로 미국 이민 신생아 남편의 사회생활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남편은 8시 30분까지 등교하는 큰아들을 학교 앞에 내려주고 9시까지 출근을 했다. 부엌데기 아줌마는 어둑어둑한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도시락 두 개를 싸고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남편과 큰아이를 꼭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오늘 하루도 힘내라고 인사하고는 남편의 차가 후진해서 밖으로 나가고 차고(garage) 문이 완전히 내려갈 때까지 문간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우리 남편 파이팅! 우리 아들 파이팅!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치면서.


혹독하고도 아름다웠던 시카고의 겨울 (Photo by dreamersonya)


일주일에도 두세 번씩 눈보라가 몰아치고 칼바람이 부는 시카고의 겨울. 차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둘째 아이와 하루 종일 집콕이었지만, 답답한지도 힘든지도 잘 모르고 지냈다. 오랜 두드림과 기다림 끝에 마침내 문 하나가 열렸고, 새로운 희망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출근 결정을 하고 며칠 후 내가 전화 인터뷰를 했던 자리에서도 대면 인터뷰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나도 취직을 해볼까 하고 둘째 아이를 맡길 동네 어린이집들을 알아보았지만 이미 학기가 시작된 후라 자리가 없거나 있어도 가격이 무시무시했다. 종일반에 맡기려면 내가 받게 될 월급을 통째로 갖다 바쳐야 할 판이었다. 일단 경단녀가 아무 관련 경력도 없는 자리에 지원해서 최종 인터뷰까지 간 사실에 만족하기로 하고, 둘째 아이를 당분간 집에 더 데리고 있기로 했다. 아쉽긴 했지만 마음은 편한 결정이었다.




시카고 근처에 정착하면서 우리는 아주버님과 형님이 출석하시는 한인 교회에 따라 나가기 시작했다. 이민 1세대인 부모 세대는 한국어로, 1.5/2세와 3세 자녀손들은 영어로 예배하는 교회였다.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는 예배 시간도, 목사님도 다르고 교회 건물만 함께 사용했다. 예배 후 한국어권 교인들은 교회 주방에서 커다란 솥에 국을 끓이고 밥과 반찬을 준비해서 점심을 먹었고, 영어권 교인들은 교회 체육관에서 커피와 베이글을 먹으며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했다. 생경한 광경이었다.


우리는 아주버님, 형님과 함께 영어 예배에 나갔는데, 미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어를 아예 못 하거나 영어가 더 편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자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입대 직전의 빡빡머리, 여자들은 긴 생머리에 아이라인을 추켜올려 눈매를 진하게 강조한 교포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만의 스타일인 것도 있겠지만, 다양하고 세련된 스타일링이 가능한 미용사가 흔치 않은 탓도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완벽한 미국 영어를 구사하면서도 중간중간 한국어 단어를 섞어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Wow, that is so 다행,’ ‘It's so 어이없어, you know?’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희한하게 자연스러웠다.


교회에 처음 방문한 사람을 쫓아다니며 어색한 대화를 시도하는 한국 교회 교인들과는 달리, 여기 교인들은 세상 쿨하고 시크했다. 아주버님 동생네 가족이 왔다고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만 묻고는 쌩- 하고 사라져 버리고, 유아실에서 아이들이 함께 놀아도 말을 섞어주기는 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넉살 좋은 누구라도 와서 말 좀 걸어줬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그런 분위기도 서서히 익숙해졌다.


하루는 유아실에서 만난 아기 엄마와 한국어로 대화를 시작했는데, 미국으로 유학 왔다가 교포 남편을 만나 시카고 서버브에 살고 있는 언니였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것처럼 마음이 통하는 걸 느꼈다. 나는 연년생 자녀들을 키우며 일하고 있는 언니와 순식간에 속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며 토닥토닥해주는 한 사람의 존재감이란.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어색하고 이질적이던 그곳이 따뜻하고 가족 같은 공동체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격주 토요일에 몇 가정이 집에 모여서 하는 바이블 스터디에도 용기를 내어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만난 1.5세, 2세 시카고 교포들과도 서서히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민 신생아들의 삽질 이야기를 들은 한 교인이 남편과 비슷한 업종에서 일하고 있는 교인을 소개해주고, 그 사람이 남편과 대화를 나누다가 또 자신의 지인을 소개해주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지인을 소개해주고... 그렇게 우리는 한 다리, 두 다리 건너 시카고에서 사람 여행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뭐라고, 언제 봤다고, 어떤 모양으로라도 도움을 주려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 놀랍고 감사했다. 쿨하고 시크했던 첫인상과는 사뭇 다른 시카고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남편은 자그마한 사업체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조금씩 활력과 자신감을 찾아갔고, 우리 가족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모습으로 현지 생활에 잘 적응해 갔다. 하루빨리 뭐라도 시작해보자며 두 팔을 걷어붙인 덕분이었고,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택이었다. 사람 사는 게 어디나 다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소속되어 살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