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알못 아들의 미국 초등학교 적응기
영어를 거의 못하는 상태로 미국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2학년 아들은 알러지가 없는데도 점심시간에 커다란 넛 알러지 테이블에 덩그러니 앉아 혼자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 (초등학교에는 견과류 알러지가 심한 아이들이 많아 그 아이들만 따로 앉아 먹는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는 집에 와 그날 먹었던 걸 전부 토해내 버렸다. 이후 하굣길에 우리는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아주버님 댁으로 걸어가며 줄곧 이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밥은 맛있게 먹었어?"
"응, 어제는 런치 테이블에 내 옆자리가 네 칸 비어 있었는데, 오늘은 세 칸 비었다 엄마! 내일은 두 칸이 빌지도 몰라!”
한국에서 학기 중에 전학을 가더라도 혼자 앉아 밥 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말도 안 통하는 학교 식당, 낯선 아이들 사이에서 혼밥이 잘 넘어갈 리가. 더군다나 본인의 선택으로 여기에 온 게 아닌데. 왜 이런 걸 겪어야 하는지 이해도 잘 안 되고 혼란스러울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아이의 시선이 참 고맙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대신 겪어줄 수도, 아이 옆에서 같이 먹어줄 수도 없는 엄마는 아침마다 아이가 좋아하는 도시락 반찬을 정성껏 싸 주는 것, 잘하고 있다고, 천천히 해도 괜찮다고 토닥거리는 것,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걸어가는 길,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 오늘은 우리 반 친구 두 명이랑 점심 같이 먹었다!”
"오오... 정말?"
"응, 어제 걔네들이 나 밥 먹는데 지나가면서 내 도시락이 ‘쏘 쿨’하다고 그랬었거든. 그러더니 오늘은 옆에 앉아도 되냐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너무너무 기뻤다. 한 친구는 세 살 때 이민 와서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한국인이고, 또 한 친구는 말레이시아인(아마도 화교)이라고 했다. 그 동양계 아이들 둘은 절친이었고, 보온도시락 뚜껑을 열고 수저를 꺼내 밥과 반찬을 먹는 아이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봐 왔던 모양이었다. 그 애들은 무얼 먹더냐고 물었더니 한 친구는 잼만 바른 식빵이랑 과일주스 팩을 먹었고, 또 한 친구는 식빵에다 햄만 끼운 샌드위치를 먹더라고 했다.
그 한국인 친구는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오는 날이 많은데, 엄마 아빠가 새벽에 일터로 가시면 중학생 형이랑 둘이서 아침을 챙겨 먹고 도시락을 싸서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온다고 했단다. 하루는 아이 반찬통 속 군만두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Wow... Can I just smell those dumplings?
(와... 만두 냄새 한 번만 맡아봐도 돼?)
분명 우리 같은 이민자 가정의 아이 같았다. 좀 나눠 먹지 그랬냐고, 다음번에는 친구들이랑 같이 먹을 수 있게 만두를 많이 싸 주겠다고 했더니 절대로 안된단다. 알러지가 심한 아이들이 많아서 점심이나 간식, 음료, 그 어떤 것도 나눠먹지 못하는 게 학교 규칙이라고 했다. 만약 어길 경우 숙제나 발표를 잘하거나 모범적인 행동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칭찬스티커를 빼앗긴다고 했다. 좀 너무했다 싶었지만 규칙은 규칙이니까. 나중에 플레이 데이트(playdate, 부모들끼리 잡는 아이들 놀이 약속)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아 아이 편에 핸드폰 번호를 적어 보냈는데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오전과 오후 Recess(30분 정도 야외 활동을 하는 쉬는 시간)에 아이는 주로 가가볼(1:1 피구와 비슷한 운동)이나 축구를 하며 놀았는데, 처음에는 텃세를 부리던 백인 아이들도 끼워주든 말든 매일같이 붙어 노는 이 동양 아이를 결국은 받아들인 것 같았다. 조카에게 물어보니 가가볼은 터프가이들이 하는 운동이고, 가가볼을 하는 동양인은 거의 못 봤다고 했다. 영어가 잘 안 되는 아이는 체육 시간을 제일 좋아했고, 운동이라도 악착같이 해서 친구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으려고 했던 것 같다.
아이의 적응을 최대한 돕고 싶었던 우리 부부는 학교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사실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만 말이다. PTA(학부모회)에서 여는 바자회, 아빠들과 아들들만 가는 운동회, 온 가족이 함께하는 게임의 밤, 인터내셔널 페스티벌, 밴드 공연, 학년별 뮤지컬 공연... 무슨 행사가 그렇게나 많던지. 영하 15도쯤 되는 칼바람 쌩쌩 부는 날씨에 패딩 안에다 아디다스 쫄바지에 쫄티를 입고 운동회에 와서 몸매를 과시하던 아빠들을 보며 여기가 진짜 미국이로구나 싶었다. 이민자의 눈에 비친 미국 부모들은 스포츠나 음악 같은 예체능 교육에 목숨을 거는 것 같았고, 상당히 풍요롭고 여유로워 보였다.
담임 선생님이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책을 한 권씩 읽어주시는 시간이 있는데, 하루는 <The Have a Good Day Cafe>라는 책을 갖고 오셨다고 했다. 한국말도 나오고 한국 음식도 나오는 책이었는데, 다 읽어주시고는 아이에게 한국말로 “goodbye”를 뭐라고 하냐고 물으셨단다. 아이가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하자 멋지다고 칭찬하시며,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아이들은 부디 모국어를 잊어버리지 말라고, 다른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건 정말 아름다운 거라고 하셨단다. 선생님도 혹시 부모님 세대에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 출신이셨을까. 기회가 되면 여쭤보고 싶었다.
아이는 그 시간 이후 더 자신감을 갖고 수업시간에 더듬거리며 발표도 하기 시작했다. 주로 선생님 말씀이나 아이들의 발표에 미국과 한국의 차이점을 덧붙여 이야기했던 것 같다. 아이는 발표할 때마다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와 함께 칭찬스티커를 받았고, 점점 더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며 밝고 씩씩해져 갔다. 사려 깊고 지혜로운 스승을 만난 것 같아 기쁘고 감사했고, 더듬더듬하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조금씩 시도하는 아이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하지 못하더라도 세상에 전할 이야기와 콘텐츠가 있는 아이, 뿌리가 견고하고 정체성이 확실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우리 아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