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잔상
어쩌면 나는 제대로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던 시기가 20대 후반이 되어서인 것 같습니다.
그전까지는 어른인 척하는 '어른이'이였던 거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면서
내가 삼십춘기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워킹맘으로 산다는 것 힘들고 버겁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못할 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죠.
사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내가 어떻게 커왔고 내 안에 있는 내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니 이렇게 살아야지, 돈을 이렇게 벌어야지, 이렇게 연애해야 지하는 생각들을 하며 산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중학생 때 예스맨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게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는데 친구들은 나한테도 공을 던지는데 저는 친구들에게 공을 세게 던지지를 못하겠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던진 공에 맞은 친구가 기분이 나빠서 나를 싫어할까 봐... 였던 것 같습니다. 모든 친구들에게 착한 친구이고 싶고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거죠. 제가 그렇게 된 이유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거절당할까 봐라는 걱정이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집은 사 남매로 시골에서 자랐어요. 아버지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건강하지 못한 가정이었어요. 적어도 아버지가 가족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 언행 때문이었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그런 시골 깡촌에서 태어나서 집 나오면 도망갈 데라고는 들판과 산밖에 없었어요. 집에서 나가는 게 두려웠어요. 집에서 거절당하면 갈 데가 없고 숨을 데가 없으니 너무나 그게 두려웠어요. 하지만 집은 평안하지 않았어요. 부모님이 다투거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모질게 하는 모습, 아버지가 언니들에게 모질게 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나도 저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과 막막함에 짓눌린 10대를 보냈던 것 같아요.
미래가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막연하게 언젠가 사회로 나가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가지고 살았었어요. 그렇게 머리가 커가며 아버지에게 반항도 해가며 내가 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위축된 마음은 좀 펴졌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크지 못한 상태에서 20대가 되어 친구들과의 관계를 비롯해서 모든 관계에서 서툴렀어요. 심지어 가족인 언니들과 엄마와의 관계 또한 서툴렀습니다. 상처 받고 상처 주는 생활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냥 나에게 30대는 오지 않을 것 같았어요. 미래가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냥 미래를 생각하고 살지 않는 게 버릇이 된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미래를 생각해도 상상할 수가 없으니까 괴로우니까 생각조차 없애고 현재 괴로운 거에 무감각하게 나를 만들자라는 생각.
그렇게 남편을 만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요즘 많은 생각이 듭니다.
내 어린 시절의 경험들과 생각들이 지금도 내 삶에 너무 많은 영향을 주고 있구나. 아직도 마음으로는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했고 나의 어린 시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구나.
어린 시절을 똑바로 마주하는 건 사실 괴로워요. 잊어버리고 싶은 시간이기도 했어요. 그것조차도 추억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마음은 아직 아닌가 봅니다. 언니들도 아버지와의 화해는 하지 못했지만 조금씩 스스로 해결을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아버지는 이미 안 계신걸요.
어딘가에 계속 나의 이야기를 불쑥불쑥 꺼내는 것도 화해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회피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의 조각들. 나는 왜 그렇게 살았어야 했나 하는 한탄과 나의 환경에 대한 원망을 많이 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냥 나는 운이 좀 없었던 거야 그때는.
애초에 우리 부모님도 완벽하진 않았었어요. 그때는 어른은 다 어른인 줄 알았거든요. 저도 어렸으니까. 내가 본 처음 어른은 부모님이었으니까요. 내가 본 처음 어른 여자는 너무나 나약하고 분해했고 초라했고 자식들을 안쓰러워하는 사람이었고 내가 본 처음 어른 남자는 괴팍하고 난폭하고 다혈질이고 이기적이고 어떤 때는 조금 불쌍하고....
지금 내가 어른으로 살고 있지만 나는 항상 마음속에 작은 아이가 있어요. 화해하지 못하는 아이 가요. 자기 계발서나 힐링 서적들을 읽곤 했는데 한동안은 내가 많이 성숙해졌고 힐링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하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그 작은아이는 표정이 없어요. 우울해요. 아직 화해하지 못했나 보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요.
한동안은 내가 왜 태어났나라는 생각도 든 적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많이들 말하잖아요. 태어나면서 모든 소명을 다했다. 태어난 것이 목적이다. 모든 존재는 소중하다. 하지만 난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살았는데.
저는 기질 상 소심해요. 남의 눈치를 많이 봐요. 남의 시선도 신경을 많이 써요. 어디에 나서는 거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큰 산 앞에 무력감을 느끼며 포기하는 법을 배우며 10대를 살다 보니 20대가 되어 어떤 객기로 어떤 거를 시작해도 금방 지쳐버리고 해도 안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안되는 걸 포기하는 게 다 나쁜 건 아니에요. 그냥 저는 제 마음속에 저를 평가절하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제가 가장 두려운 것은 딸아이에게 저의 이런 배경과 성격과 모습들이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어요. 남편에게도 요. 나의 불완전함이 사랑하는 가족에게 영향을 주다니. 누구나 싫잖아요.
미래를 살고 싶지만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저는 불완전한 인간이네요. 화해를 해보려고 수많은 시도들을 해왔지만 아직도 화해하지 못한 저는 여전히 ing입니다.
요즘 시도해보는 건 있어요. 연애시절 그렇게 다정다감했다는데 제가 변했다며 신랑이 섭섭함을 많이 말해요. 성격이 변했다기보다는 무뚝뚝해졌다는 거죠. 물론 육아와 이런저런 다른 게 겹쳤을 수도 있지만 내 가족, 내 사람에 대한 배려와 마음가짐이 예전 아버지와 닮은 부분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한 번씩 스칩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제 몸이 얼어붙어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자꾸 무뚝뚝하게 돼요. 애정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아버지처럼요.
그걸 고쳐보려고 작은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전화 오면 친절하게 받기. 문자에 이모티콘 넣기.. ㅋ
이 정도도 괜찮지 않나요?
적당히 흔들리게 지내면서 괜찮게 지내려 노력 중입니다. 토닥토닥 내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