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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달 Jan 07. 2020

나의 꿈에 대하여

내가 원했던 삶. 내가 원하는 삶.

 제목이 거창해 보이지만 어떻게 쓸지 모르고 일단 제목을 쓰고 본다.

내가 원하는 삶, 꿈에 대해 말하려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서 말해보려 한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좀 가난했던 것 같다. 가부장적이고 자상하지 않은 아버지와 억눌려 살던 사랑이 많던 어머니. 두 언니와 남동생. 내 주변 내 나이 또래에 비하면 형제가 꽤 있었다.

 큰 언니는 아버지의 미운 큰딸이었던 것 같다. 항상 아버지에게 혼이 나고 화풀이 대상이 되었던 것 같아 항상 마음이 짠하다. 언니가 맏딸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응석이라도 부렸을 텐데.

 둘째 언니는 나름 고집이 셌다. 그냥 어린 시절의 반항심이 키워낸 듯한 잡초 같은 사람이라 기억이 된다. 하지만 지금 보면 여리디 여린 하얀 거품 같은 언니다.

 남동생도 생각하면 짠하다. 아들로 태어나서 그 시골에서 큰 소리로 울어보지도 못하고 세 누나 밑에서 억눌려서 컸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 짠한 이야기만 하지만 사실 나의 형제들은 마음속에 항상 애틋하고 짠한 사람들이다. 어려운 세월을 함께 헤쳐왔기도 하고 어느 하나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은 대견하고 든든한 가족이니 말이다.


 엄마는.. 사람이 다 똑같다. 엄마라는 말만 마음속에서 불러도 눈이 빨개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사랑이 많던 엄마의 세월이 애틋한 것도 있지만 한 여자의 인생으로 보면 배우자에게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산 세월이 참 안쓰럽다. 그런 엄마는 결국 60에 배우자를 잃고 아주 조금 있던 재산도 빚을 청산하고 혈혈단신 무일푼이 되어 세 자식에게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지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아는 엄마는 자존심이 아주 세다. 어린 시절 돈이 없어서 큰소리를 치던 마을 어르신에게 말리던 아빠도 뿌리치며 그 바람에 윗옷이 찢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끼눈을 뜨고 버럭버럭 큰소리를 치시던 간 큰 여인네였다. 그 시대에는 나이 어린 애엄마가 어르신에게 하극상을 하는 거였을 것이다. 그 모습이 부끄러워서인지 아빠는 엄마를 모질게 다그쳤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은 큰 언니가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가 되었는데 선물을 살 돈이 없었다. 반찬값의 일부를 엄마는 큰언니에게 선물을 사라며 주고는 둘이서 입을 맞췄는데 그게 아빠가 눈치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살림살이하라고 줬던 돈을 10원까지 적어서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엄마랑 큰언니는 놀란 가슴으로 "어떤 걸 적지, 어떤 걸 적지, 아! 콩나물 샀다고 하자. 또, 또 뭐 샀다고 하지.." 하며 건넛방에서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불안함과 다급함에 무언가를 적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 모습은 나의 머릿속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우리 가족을 옥좨는 못된 개 주인 같은 느낌으로 남아버렸다. 그렇게 어릴 때 생긴 아빠에 대한 편견은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아마 아빠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미운 감정은 어느 정도 남아있었고 지금도 사실 그 시절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다 사라지지 않았다.

 돈에 대한 가치관을 형성하기에는 내가 커온 환경은 그걸 깨닫기에는 너무나 매일매일이 불안했고 어린 마음으로는 생존과 연관이 지어졌기 때문에 돈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커서 대학생이 되었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시골에서 자라 온 나는 마치 바닥에 내팽개쳐진 옷가지같이 하찮고 볼품이 없었다. 그럼에도 자존심은 세우고 싶어서 같은 과 동기들에게 날이 서 있었고 마음을 다 열지 못했다.

 내 마음속에는 8살짜리 어린아이가 살고 있었고 한 번씩 울컥울컥 억눌렸던 서러움은 주변 사람들에게 냉소적이고 까칠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겉모습은 철이 들고 성숙한 숙녀 모습이었지만 마음속 작은 방에는 항상 8살짜리 불안에 떨던 내가 있었던 것 같다.

 너무나 무지하고 세상이 무서웠던 나는 돈이나 재테크는 나와 다른 세상 이야기이고 나는 안정적인 직장과 월급만 잘 받으며 생존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직장 초년생 몇 년을 보냈다.

아무 생각 없이 흥청망청 그 전의 세월을 보상하고 싶다는 듯이 그냥 그렇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알게 된 사실이 같은 회사 동기 중에 부모님이 재테크를 해주고 돈을 알뜰히 모아 준 친구는 같은 시기에 나보다 훨씬 많은 돈을 모아놨었다. 다들 나와 비슷할 거라고 착각하며 즐기며 사는 것도 잘하는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지내던 나는 갑자기 현실이 확 와 닿는 걸 느꼈다.

 '아직 살 날이 많은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나는 혼자 잘해 나갈 수 있을까.. 부모님이 도와주는 데 저만큼은 해야지.. 나도 사실 돈 많이 벌고 엄마한테 돈도 팍팍 주는 딸이 되고 싶은데.. '


 정말 현실에 눈을 뜬 건 30대가 다 되어서 인 것 같다. 20대가 어떻게 지나가버렸는지 기억도 잘 안 날 지경이다. 가난하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탓하며 지내고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충동적, 즉흥적으로 지내오던 세월은 후회로 남지만 그때의 시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그게 나에게 맞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100세 시대 120세 시대라고들 말하는데 사실 실감은 아무것도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60세에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내 주변에 100세까지 살고 계신 분이 없다. 이렇게 내가 놓인 환경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이고 그 우물이 어떤 우물 인지도 내가 아는 만큼으로 판단하고 있다. 내가 회사에서 배우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는 이미 선진국 같은데 내 피부에 느껴지는 건 여전히 불합리와 부조리와 부패한 문화인 것 같아 괴리감이 든다.


  누가 보면 밥 굶어가며 찢어진 옷 입고 다닌 듯한 척, 불쌍한 척한다고도 하지만 나 나름의 체감은 정말 6.25 전쟁 때의 느낌이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는 그 시절은 그랬다. 작고 어린 나에게 절대자인 아버지는 너무나도 나에게 불안감을 주는 존재였고  어머니는 그 무력을 견뎌낼 힘이 없는 나약한 여인네였다.


 이제 나는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세상살이의 이치를 조금 이해하고 어른들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은 시기가 온 것 같다. 그것과 동시에 어리고 젊은 때의 내 마음을 잊어버리곤 한다. 나는 어떤 아이였지?..


 지금도 마음 한편에는 꿈.. 꿈이 뭐였지 하는 생각꾸러미가 있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이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인 것 같은 느낌도 조금 든다. 평범하게 직장 생활하고 아기 키우고 살림하고.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냐며 핀잔주는 친구에게 나는 항상 무언가가 부족한 것 같아서 찾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사주에서는 나보고 문화센터 팔자라고 한다. 문화센터이라 함은 문화센터의 줄임말이다. 3개월마다 공부를 새롭게 시작하며 진득하게 못하고 흐지부지 얕은 공부만 하는 팔자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들으니 괜히 오기가 생기더라. 내가 뭐 진득하지 못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말로 인해 사주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 가슴 뛰는 일,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보상도 없이 취미로 하지 않는 이상은 업으로 삼기는 힘들 것 같다.


 한 동안 유튜브를 많이 찾아봤는데 역시 답은 '책'이다. 모든 자기 계발, 동기부여, 성공 이론의 결론은 공부와 책 읽기로 모아지고 있더라. 일단 나를 갈고닦고 깊이 생각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고민하면 길이 보이리라 믿는다. 자신감 없고 정체성도 찾지 못하며 자존심만 세던 나는 나를 찾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가고 스스로 갈고닦아 가며 앞으로 살 날이 많은 날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 살았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싶다. 그게 나의 꿈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전과 다른 고민을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어느 세대 건 고민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어릴 때 하던 고민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다만 고민의 스펙트럼이나 깊이가 다를 뿐이다. 그때 누군가가 혹은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걸 어떤 포인트 건 알려줬다면 내가 그나마 덜 어려운 길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 싶다. 고생한 값이 크다고 하지만 그 고생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좀 먹는 일이 될 수 도 있다는 걸 안다. 그런 길을 어떻게 찾는지 정도는 알려줘도 고생의 값을 치르지 않았다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오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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