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를 바라보는 동생의 마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갑작스럽게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은 놀랍다기보다는 그냥 무덤덤하기도 하다.
“우리 갈라서기로 했어.”
명절에 언니에게 그 말을 듣고는 내가 생각했던 최악이지만 일어나지는 않겠지라고 하던 일이 일어났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냥 적당히 싸우며 사는 평범한 부부라고 생각을 해왔고 저러다가 나이 들면 덜 다투겠지 했었다.
10년 세월을 뒤로하고 도장 하나에 남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부부로 사는 게 참 다 뭔가 하는 마음이 든다. 서류 한 장이 어떤 걸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걸 살면서 알게 된다. 노력하고 애쓰고 배려해도 서로 맞지 않는다는 건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할까.
각자 나름의 배려의 척도를 가지고
나름의 행복의 척도, 적당함의 척도,
씀씀이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데
결혼을 하면서 그 척도를 상대가 나에게 맞추기를
또 맞추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둘만 잘 살면 되는 게 아니더라.
하루하루 각자 서로의 집안에서의 ‘나’로 살아가야 하는데
두 집안의 중간 합의점을 잘 찾고 잘 합의가 된다면
각자 살아온 두 집안에서의 역할도
큰 문제없이 잘 해나가게 된다.
두 집안의 끄나풀이 평생 연결되어 있는데
둘만 잘살면 된다는 건 일반적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라서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웃기는 소리일 것이다.
그렇게 연애 때부터 봐왔던 커플, 부부는 헤어진단다.
서로 각자의 집안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그 익숙한 집안에서 기존의 구성원의 역할만
하게 되는 것이 행복하다는 언니.
결혼과 동시에 며느리라는 사위라는 새로운 역할이 부여되고 잘 모르는 집의 구성원이 된다.
새로운 구성원이 들어와도 각자의 집안 문화는 그대로이기에 새롭게 들어간 사람이 알아서 적응하고 알아서 자리를 잡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역할에 대해 과도한 짐을 주거나 그 집안 문화만을 고집하게 되면 새로운 구성원은 당황하고 반발심이 들것이다.
아직은 며느리라는 역할은 후진적인 개념을 가진듯하다.
며느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되어있지는 않지만 결혼과 동시에 주변으로부터 스스로의 학습된 개념으로부터 어떤 걸 해야 하는지 대충 알게 된다.
결혼을 해도 ‘나’라는 큰 원 안에 부부로서 남편과 아내라는 작은 원들이 생기고 그 안에 더 작게 며느리와 사위가 생긴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 ‘나’라는 큰 원이 며느리가 되었다 생각하고 부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애엄마가 되었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원의 개념이 바뀌는 순간 불행이 몰려온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이기에 변하지 않는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가는 것인데 그 역할들에 매몰되어 살지 않았으면 한다. 그 소역할들이 내 삶을 행복하게 하고 가치 있도록 가득 하게 하려면 ‘나’로 살아가고 있음을
부부 서로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어떤 사람에 대해 어떤 것도 단정 짓기도
한계 짓기도 싫다.
나이 마흔에 아이 둘 두고 이혼했다고
불행하거나 불쌍하거나 어리석다거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그이기에 그의 인생을 살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동생인 나는 그냥 마음으로 응원하고
그가 모든 순간은 아니더라도
행복하길 기도할 뿐이다.
부디 행복하길.
후회는 조금만 하길.
건강하길.
앞날에 기대가 되는 인생을 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