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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공장장 Feb 16. 2023

세네카의 『섭리에 관하여』를 읽으며,

- 어머니를  그리며

   도서관을 오가다 인문학 수업 과정이 우연히 눈에 띄어 수강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처음 생각에는 나 자신이 너무 메마르게 살아 가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 혹은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에 신청을 하기는 했지만 과연 바쁜 일정을 쪼개며 다닐 수 있을지 첫날부터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가능한 한 출석하여 듣고자 하였고 이제는 어느새 과정의 절반 정도가 지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매주 정해진 책 분량과 작품을 읽지 못하고 오는 주가 그렇지 않은 주보다 많은 것도 사실이어서 왠지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사실 어떤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읽고 있는 것이 나의 ‘일상’인데 그것이 인문학적인 책이 아니라 대부분 ‘일’과 관련된 것들이어서 가끔은 황량한 사막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저녁 시간에 참석해서 내용을 듣는 것만으로도 생각을 하게 하고 위안이 되는 부분도 많았던 것 같다. 대부분의 글들이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형식으로 쓰여 있어 이해가 어려웠던 점도 있었으나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점차 좀 더 이해하기 편해지는 부분도 있었다. 오래전에 살았던 이들이 살아가면서 느끼고 생각했을 법한 것들을, 또한 그것들을 글로 표현한 것들을 ‘지금-여기’(hic et nunc) 나 역시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같은 인간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세네카의 『섭리에 관하여』라는 글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내용에 대해서도 접하다가 그가 말하고자 한 바를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하여 재고(再考)해 보기로 했다.


   작품 자체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이번 강좌를 통하여 특정 단어에 대하여 어원과 관련된 뜻을 살펴보는 것이 나름 의미 있는 작업 같았기에, 나 또한 서툴지만 교수님을 흉내내어 한번 시도해 보았다. ‘섭리(providentia)’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섭리(攝理)란 1. 아프거나 병에 걸린 몸을 잘 조리함. 2. 대신하여 처리하고 다스림. 3.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 4. 세상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와 있다. 『종교학대사전』에는 섭리(providentia, pronoia)를 “신 또는 신적 존재의 피조물에 대한 계획ㆍ의도를 말한다”라고 정의하며 다음과 같이 보충 설명하고 있다. 



라틴어로 providentia, 그리스어로 pronoia. pro는 “미리”와 “~를 위해서”의 두 가지 의미가 있으며, 예지, 예견, 배려의 뜻이다아이스퀼로스의 극 『프로메테우스』는 이 이름으로 불린 신이 인간의 운명을 예견해서 배려했다는 것으로 제우스에게 벌을 받았다는 것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섭리가 운명과 자유의 중간의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스토아철학은 세계를 지배하는 영원의 로고스(법칙, 규정) 하에서 어떻게 자유가 성립하는지를 논하고, 가능과 현실, 필연과 우연에 관한 양상논리에 착수하는 동시에, “자연본성에 따라서 살아가는” 의지를 인간에게 인정했다. 이는 우주의 로고스와 내적인 로고스와의 조화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가톨릭: 하느님)의 선택과 예정 하에 세계와 인간이 유지되는 것을 섭리라고 하였다. 그것은 구제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악이 맹위를 떨치는 이 세상에도 구제는 준비되어 있다고 믿는 것으로, 십자가의 역설을 지지하는 비유적인 새로운 인식의 하나이다. 근대 철학에서는 자연법이나 진보의 관념이 하나님의 섭리의 대용품이 되고, 뉴턴에 의하면 신은 유능한 시계사로, 세계는 이로써 만들어진 자동시계라고 한다. 독일 낭만파의 역사주의나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서는 섭리는 역사와 실천 중에 놓여있는데, 이에 대해서 사르트르나 메를로 퐁티는 섭리라고 하지 않고도 역사의 양의성을 주장하고, 실천에 관한 소박한 옵티미즘을 배제하고 있다.


 

   이처럼 ‘섭리’라는 단어의 뜻에서 일단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배제한 채 신이든 자연이든 절대적인 힘에 의하여 선택되거나 예정된 것에 대한 강조이다. 만일 그렇다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신을 경배하거나 가까이 생각하는 경우에는 섭리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표현일 수도 있으나 인간의 주체적인 자유의지나 의식을 생각하는 경우에는 반대로 반항심이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개념인 것 같다. 동일한 사람이라고 해도 인생에 있어 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거나 종교적 신념이 변하면 섭리라는 말의 어감도 달라질 것이다.

 

   『섭리에 관하여』는 세네카가 루킬리우스에게 헌정한 글이라고 한다. 피헌정자 루킬리우스가 품었던 의문이기도 한 이 글의 부제 “섭리가 있다면 왜 선한 사람들에게 불행이 자주 닥치는가”는 무척이나 인상적인 물음이었다. 아마 누구든 이러한 부분에 대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치 자신에 대한 일인 듯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행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과거에 한번쯤 이러한 물음을 머금은 적이 있을 것이고 또는 미래에 이와 같은 의문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우리말 번역본 『그리스, 로마 에세이』 소개글에 있는 문구 중 이 글이 언제 저술되었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세네카가 직접 쓴 것이라면 일단은 현재의 우리가 지닌 세계관이나 종교관과는 다른 입장에서, 우리 세대보다는 좀 더 섭리에 대하여 그것이 신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숙명적인 태도를 가졌을 것이다. 물론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종교관 및 삶의 배경에 따라 섭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기는 할 것이다.


   이제 내가 『섭리에 관하여』를 읽으면서 주목한 몇몇 대목에 대하여 이하에서 되짚어 보고자 한다.

세네카는 작품 초반에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오. 나는 신을 위해 변론하게 될 테니 말이오”(『섭리에 관하여』 1.1)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맞게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시대에서 섭리에 대하여 누구도 도전하기 어려운 신을 위해 변론하는 것이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지금도 신과 섭리의 측면에서 논하는 것이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여전히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들이 받아들인 선한 자들은 수고하고 땀 흘리며 힘들게 위로 오르는데 반해 악한 자들은 방탕한 짓을 하며 쾌락에 몰두해요. (중략) 신은 선한 자를 응석받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고 단련하며 자신을 위해 준비시키니까요” (『섭리에 관하여』 1.6)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반대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만일 신이 우리가 기대하는 신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러한 신이 없다면 이러한 논리는 오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선한 자’(선한 자라는 정의도 다소 불분명하지만)를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한 논리로 작용된 점은 없는지 반문(反問)하게 된다. 물론 인생을 살아가면서 역경을 극복하고 역경을 이겨내는 데 위안이 되는 좋은 말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특정 집단이나 사회에서 이것이 악용되어 선한 대중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데 이러한 논리를 통해 ‘신의 섭리’라는 말을 오남용한 부분도 있어 보여 못내 씁쓸한 느낌도 든다.



“미덕도 적대자가 없으면 무기력해지게 마련이오. 미덕이 참고 견디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위대함과 힘이 드러나는 법이지요” (『섭리에 관하여』 2.4) 



   이 말은 대체로 수긍이 간다. 아무리 미덕이 있어도 그 반대자나 어려움이 없다면 인간은 무기력해지거나 나태해질 것이 태반이리란 생각 때문이다.



“신은 선한 자들을 사랑하여 그들이 더없이 선하고 탁월하기를 바라거늘, 그러한 신이 그들을 단련시킬 수 있는 운명을 배정한다고 해서 뭐가 그리 놀랄 일이란 말이오!” (『섭리에 관하여』 2.7)



   이 또한 역경을 통하여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경우에는 효과적인 격려요 큰 위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마저도 역시 단순히 위로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그 고통이 너무 크거나 너무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이 섭리일 수 있을까? 반대로 이루어질 수도 없는 그저 우리의 바람과 희망에만 그친다면 너무 허무할 수도 있어 보인다.



“내가 보기에 불운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는 것 같소. 그러한 사람은 자신을 시험해 볼 기회를 얻지 못했기 떄문이오.”(『섭리에 관하여』 3.3)



   이 대목은, 섭리를 떠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성공한 사람이든 실패한 사람에게든 마찬가지로 의미 있게 다가갈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다소 주관적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 해도 그에게도 역시 불운이나 역경은 있을 것이고 이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경험하기 마련인 그 무엇일 듯하다. 전혀 경험하지 않은 것에 비하여 불운이나 역경을 경험하는 것이 분명 무엇인가는 얻는 것도 있을 것이기에 인생의 무미건조함을 없애 주고 그 불운을 이겨낸 후에는 반대로 희열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실험이 필요하오. 시도해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불행이 머뭇거릴 때는 자진하여 불행으로 다가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을 자신의 미덕이 빛을 내뿜을 기회를 찾았던 것이오” (『섭리에 관하여』 4.3) 



이 또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긍정의 힘을 주어 삶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문구라 생각된다.



“왜 신은 하필이면 가장 선한 자를 질병이나 슬픔이나 다른 불상사로 괴롭히는 것일까요? 군대에서도 위험한 일은 가장 용감한 군인들에게 맡겨지게 마련이오. 장군은 조심스럽게 선발된 군인들을 보내 적군을 야습하고 길을 정찰하고 수비대를 몰아내게 하지요. 출발하는 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장군은 내게 못할 짓을 한 거야”라고 말하지 않고 “장군은 나를 좋아하나봐”라고 말할 것이오” (『섭리에 관하여』 4.8)



   이 인용문 역시도, 인간으로 하여금 긍정적으로 역경에 대처하도록  독려하는 문구인 듯하다. 그러나 이 또한 역경에 대해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석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왠지 그 신이 선한 뜻을 가진 신이 아니라 다른 인간이고 그 다른 인간이 나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왠지 씁쓸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만사는 우리 생각처럼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만사를 용감하게 참고 견뎌야 하오” (『섭리에 관하여』 5.7)



   이 문장은 과도하게 숙명론처럼 들려 사실 지금의 나로서는 긍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 과연 그런 성격의 것인지 아닌지를 나 또한 지금 인지하거나 판단할 수는 없으나 하릴없이 답답한 생각이 든다. 운명론 혹은 숙명론이나 신정론이 맞다고 가정해도 개인적으로는 완전히 믿고 싶지는 않다.


   “만물의 창시자이자 조종자인 그분도 운명의 법을 입법했으나 그것을 따르고 있소. 그분은 단 한번 명령하고는 늘 복종하지요”(『섭리에 관하여』 5.8)라는 표현 역시도 앞에서 살펴본 대목처럼 너무 결정론적 느낌을 갖게 한다.



“하지만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나는 너희가 그것을 면하게 할 수 없었기에 모든 것에 대항할 수 있도록 너희의 마음을 무장시켰다. 너희는 용감하게 참고 견뎌라. 이점에서 너희는 신을 능가할 수 있다. 신은 불운을 참는 것 밖에 있으나, 너희는 참는 것 위에 있으니까 말이다. 가난을 무시하라. 태어났을 때만큼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통을 무시하라. 고통은 사라지거나 너희와 함께 끝날 것이다. 죽음을 무시하라. 죽음은 너희를 끝내거나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운명을 무시하라 나는 운명에게 너희의 영혼을 칠 수 있는 무기를 주지 않았다” (『섭리에 관하여』 6.6)



   앞에서 살펴본 대목들에는 운명론처럼 보이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 부분은 다소 상반된 뜻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을 굳게 하고 운명에 휘둘리지 말라는 뜻인가? 내가 맞게 해석한 것이라면, 나 또한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나, 이 또한 섭리라는 틀 속에서 인간의 마음가짐을 통하여 그 섭리가 마치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그 역경을 이겨내도록 하는 것이라면, 이런 입장과 태도 역시 운명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무도 너희 뜻에 반해서 너희를 붙들지 못하도록 배려해 두었다. 인생에서 나가는 길은 열려 있다. 싸우고 싶지 않으면 도망쳐도 좋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필요할 성싶은 모든 것들 가운데 죽음을 가장 쉽게 만들어 놓았다. 나는 영혼을 쉽게 사라질 수 있도록 급경사진 곳에다 세워 두었다. 유심히 살펴보기만 하면 얼마나 짧고 편리한 길이 자유를 향하여 나 있는지 너희는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나갈 때는 들어올 때만큼 오래 걸리지 않게 해 두었다. 인간이 태어날 때만큼 천천히 죽는다면, 운명이 너희에 대해 큰 권세를 가질 테니까 말이다.” (『섭리에 관하여』 6.7)



   운명에 대한 대항이 ‘죽음’뿐이라는 것인가?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섭리가 존재한다면 세네카의 말대로 살아서 역경을 극복하는 것이 유일한 선인 것 같다. 그런데 만일 삶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선인가, 악인가? 그리고 죽음이 무서워 그냥 사는 것의 경우, 이는 선인가 악인가?



“자연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자연에게서 받은 선물을 돌려주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매 순간과 모든 장소가 너희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섭리에 관하여』6.8)



   섭리나 역경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을 통해 신이나 자연이 정한 섭리나 역경을 거부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다소 난감하다. 만일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역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인생을 오랫동안 살아가거나 그대로 육체적 생명을 다하는 경우에는 신이 인간에게 준 역경은 어떤 의미인가? 신의 선한 뜻인가 아니면 신이 인간을 무관심하게 역경에 방치한 것인가? 신은 선한 것인가 아니면 신은 존재하는가, 이런 식의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스토아철학이나 신정론이 맞는지 그리고 『섭리에 관하여』라는 글에 담긴 신이나 자연의 섭리가 실제 존재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삶의 역경을 이겨내는 근거와 긍정적 자세를 독려하는 입장은 일리 있어 보인다. 역경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며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여 그것을 이겨낸 경우, 『섭리에 관하여』처럼 긍정적인 태도를 권장하는 작품은 분명 역경을 극복하는 힘을 줄 수 있다. 나 또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가, 특히 정치사에서 인간에 대한 지배 논리로 작동한다면 문제가 될 것 같다. 인류사에서 이러한 철학이나 사고가 일부 악한 의지를 가진 지배층에 의해 전용(轉用)되어, 선하거나 미처 의식하지 못한 대부분의 인간을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면 이는 분명 선한 신의 뜻도 아니고 이용당한 이들의 자유의지로 인한 것도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실제로 운명론이나 결정론이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리고 자유의지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섭리란 것이 있다 해도, 이것을 믿는 것과 역경을 이겨내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듯하다.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인간이 반드시 선에 의해 행복해진다는 것이 섭리라면 모를까 역경을 겪은 결과가 나쁘다면 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이에 대해서는 『섭리에 관하여』에서 세네카가 답을 주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냥 살아 보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섭리론의 긍정적 측면과는 대조적이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있다고 해도, 역경이 신이 준 선물이라고 해도 나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이 최근 인공지능 연구와 함께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듯한데, 우리가 단순히 신의 피조물로 무의식 속에서 그냥 신의 뜻을 구현하면서 사는 사람 아닌 사물과 같은 존재라면, 오늘의 역경을 이기며 살 필요가 무엇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모든 것이 예정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정말 『섭리에 관하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에게 대항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나는 『섭리에 관하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낯설지가 않았다. 그것은 내 어린시절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나의 어머니께서는 스토아학파나 신정론이나 섭리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잘 아셨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내가 힘들어할 때면 세네카와 같이 『섭리에 관하여』에 나온 몇몇 문구와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의 살아오신 생애에서 나온 그 말씀에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항상 역경은 이겨낼 수 있고 이겨낸 후에는 행복한 시간이 온다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말씀이나 뜻은 그분이 계시지 않은 오늘을 살면서 어려움이나 시련이 다가올 때면 무의식 중에 되살아 난다.


   메마른 사막에서 메마른 글과 정보의 홍수에서 살다가 우연히 참석하게 서양 고전 강의 중에 『섭리에 관하여』란 글을 통하여 어머니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신의 예정이 있든 없든 다시금 생(生)에 대한 긍정의 마음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은 사실 오래 전에 쓴 글이다. 이 글을 다시 보니 당시에 이 글 초안은 밤 12시 3분에 쓴 것 같다. 이에 대하여 다시 일부 수정하면서 작업하는 이 시간도 밤 1시 45분이 넘어가고 있다. 어쩌면 섭리에 따라 이 글을 지금 수정하는 것이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 수정하여 브런치에 발행하겠다고 하는 것이 나 자신이 마음을 먹고 나의 의지에 따라 발행하는 것인가? 당시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더 미궁에 빠져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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