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3 비도 오고 그래서
범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나는 항상 입에 미안해를 달고 살았었지. 네가 누나가 왜 미안해요.라고 말할 만큼.
6년이 지나서 잠깐 얼굴 보는 자리에서도 나는 또 너에게 미안했구나.
나는 나름 미안해라는 말을 이기적이게 사용한다고 생각했어. 어차피 계속 봐야 하는 사람인데 굳이 얼굴 붉힐 필요가 있겠나 싶었으니까.
불편하게 하는 상황에서 관계가 어그러질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면, 그 관계가 나랑 전혀 관련이 없어도 다 내가 미안해라고 했었지.
내가 틀렸어. 누가 부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처해서 소속된 집단에서 기대하는 내 역할에 충실했더라고. 이를테면 밝고, 해맑고, 항상 기쁜 그런 사람.
미안해라는 말로 적이 안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나와 오래 함께 할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같이 하게 되어있고, 떠날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떠나는 법이잖아. 그걸 알기까지 몸과 마음이 이렇게 망가졌지 머야..
우리 다시 만날 때는 내가 나를 우선으로 보살피고, 나랑 안 맞는 것을 굳이 맞추려 하지 말고, 불편한 것은 불편하다고 말하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 있을게!
6년 전에도 6년 후에도 누나가 미안할 건 없다고 말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도 못한 순간에 니 얼굴이 보여서 분위기가 무거운 장소임에도 엄청 반가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