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홈리스, 도대체 왜?
2년간의 미국 생활로 세 식구였던 우리는 엄마, 아빠, 딸, 아들 완벽한 네 식구가 되었다. 한국에 갈 준비를 하던 그 남자는 당장 모아둔 돈이 없으니 집을 할 여력이 없다 하였다. 정확하게 빚이 싫다고 했다.
당장 한국에 들어가서는 그 남자의 아버지 댁에서 지냈으면 한다고 했다. 그 남자의 아버지댁은 시골에 있었고 평일에는 거의 비워있는 집이었다. 그곳에서 나에게 세돌 딸과 갓 백일 지난 아들을 혼자 양육하라고 했다. 가끔 그 남자의 아버지가 일이 없으실 때 오셔서 아이들과 나를 살펴 주실 거라고 하였다. 그 남자는 그 남자의 엄마 집에 기거하며 주말에 내려오겠다고 했다.
그 남자는 한국에 가면 아이들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양육 수당, 부모 수당까지 생각해서 말을 했다. 첫째를 어린이 집에 보내게 되면 보육료로 빠지는 것까지 계산해서 나온 결론이었다. 아이 양육은 오롯이 내가 혼자 해야 한다.
첫째 아이는 발달상 이제 타인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는 시기였다. 미국에서는 그런 기회가 없었으니 한국에 오면 어린이 집을 통해서 사회에 나갈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둘째 누나가 카드 빚을 갚지 못한다고 했을 때, 개인회생 돈을 못 낸다고 했을 때, 대출을 받아 빚을 만들었던 사람이 아니던가.
빚은 지금 져야 한다. 그 남자가 선택한 여자와 아이들을 위해서. 그 남자만 바라보는 처자식을 위해서.
적어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처자식을 맡기다니.
11월 중순 그 남자의 귀국으로 약 두 달 동안 아이 둘을 데리고 S시, C시, J시를 오가며 생활했다. 풀지 못한 짐을 들고 그렇게 세 집을 오가며 생활했다. 그 남자는 지도교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에 S시에서 생활을 했다. 나는 나의 아이들과 그 남자를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S시에서 계속 생활을 할 거라면 나도 일을 구해보겠다고 했다. 빚이 힘든 거면 같이 벌어서 집을 구해보자고 했다. 그 남자는 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자신의 엄마는 아이들을 돌봐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보고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 했다. 그 남자는 함께 아이를 돌보는 것은 어렵다했다.
S시의 생활은 대략 이랬다. 15평 그 남자의 엄마와 둘째 누나가 사는 곳이며 첫째 누나가 공부방으로 과외를 하는 곳이다. 그 남자의 엄마는 첫째 누나의 살림과 육아를 해주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8시쯤 아침을 먹는다. 그 남자는 엄마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9시가 넘어서 출근을 했다. 나는 돌쟁이 아이를 앞에 안고, 첫째 손을 잡고 그 남자의 첫째 누나 집으로 걸어갔다. 그 남자의 둘째 누나와 함께.
그 남자의 첫째 누나의 집에서 점심, 저녁을 다 해결했다. 첫째 누나의 스케줄에 따라서 나와 아이들은 그 남자의 엄마가 거주하는 곳으로 온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둘째 아이를 안고 젖을 주면서 오른손으로 첫째와 놀아주고 있었고 내 입은 10살 조카아이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첫째 누나 집에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는 내 모습에 왈칵 눈물이 났다. 나에게 여유가 없어졌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따로 말했다.
너희가 신혼부부 대출을 받아서 같이 살자고 했다.
빚이 싫다던 그 남자는 신혼부부 대출을 받아 엄마와 둘째 누나와 같이 살자고 했다.
신혼부부 대출을 받으면 전세금의 80%가 나오니 나머지 모자란 금액은 그 남자의 엄마와 누나가 가진 돈으로 한다고 했다. 대출받은 대출 이자와 관리비는 자신이 부담한다 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빚이 싫다더니 결국 빚을 낼 거다. 그 남자가 말했다. 그건 빚이 아니란다. 엄마와 누나와 꼭 같이 살아야 한다 했다.
내가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오롯이 내가 돌봐야 한다. 그렇게 내가 친정에서 살 게 된 이유였다. 3월, 경력복귀지원사업을 통해 나는 출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