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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Hunter Jan 18. 2024

출간이라는 착각

아무튼 출간

책 출간하는 일이 지금 제 삶에 모든 것입니다. 하루 종일 온통 그 생각뿐입니다. 길에서 원수를 만나도 더 이상 극렬하게 밉지가 않습니다. 이제는 시집가서 대면 대면한 예전 소개팅녀를 마주해도 푸근하게 용서하는 웃음으로 대합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더니 살면서 이렇게 제 얼굴이 편한 시기가 없습니다.




그렇다보니 '날 사랑한' 박영사 측에 뭐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글을 다듬고 부장님께 부탁받은 소제목 작업 어서 마무리해야지 싶다가도 부족합니다. 뭐가 더 없을까? 우선 이 일에 가장 적극 동참하시는 노사임당 쎔이랑 작업을 더 해봐야겠다.


Wicked, 2024, Sydney


"노쎔, 전데요. 책 디자인 의견하나 드릴 것이 있어서요. 책을 검은색으로 하고 노쎔 서체는 빨간색으로 하면 어떨까 해요. 사랑이라는 글씨랑 빨강이 잘 어울리고 검은 책을 생각한 것은 얼마 전에 보았던 뮤지컬 Wicked에서 마법사가 들고 다니던 음치하고 두꺼운 책이 끌렸어요. 슬픈 운명에서 당신을 깨워 준다는 것이 정신분석이니 그런 마법 같음을 사랑해요."


"오!! 그럼 느낌이 조금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느낌 떠오르는 대로 계속 말씀 주세요. 바로바로 느낌 살려야 하니까요^^"


오우케이. 우선 이렇게 내 감성을 살려서 임시 책자를 만들어 출판사 부장님에게 보내면 나중에 디자인 팀에게 전달해 주시고 내가 원하는 그런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비밀스러운 OZ 마법사 책 같은 것이 탄생하겠구나!


노사임당, 2024, 사랑이라는 착각

이렇게 해서 지난 글 <종이 공포증>에 나온 서체들을 전달받습니다. 하지만 내 무의식에서 만든 딱 그런 모습은 아니라서 계속 조금씩 수정 주문을 합니다.


노쎔, 표지 색은 어두운 검은색이면서도 마법사가 아끼는 듯한 애절함이 묻어나는 것으로 해주시고요. 빨간 글씨는 섹시하면서도 그로테스키한 거친 따스함을 반영하는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내가 말하고도 무슨 소리인지..)


아니야, 아니야, 이건 아니야!!!!!


마치 고뇌에 찬 베토벤이 운명을 작곡할 때 같은 기분으로 노쎔이 전해준 서체를 박박 그으며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좀 더 그로테스크하고 야하게 할 수 없나요?


이렇게 쥐 잡듯 노쎔을 달달 볶자 슬슬 노쎔이 내 눈치를 보면서 피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tool이나 재료로는 내가 이야기한 느낌 (나도 모르는 그 느낌)을 살리기 힘들다 생각했는지 간판 회사에 문의하고 백방으로 마법사 도포자락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으려 방방 뜁니다.


"저는 어디 간판회사에 물어보려는 중이었어요. 아이패드 같은 거로 한 게 아니라서 스캔이나 사진도 쓸 수 있나 물어보려고요."


음악에 대해 조또 모르는 관료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에밀레종 제작자를 달달 볶다가 결국 생사람까지 쇳물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지만 그 이야기 중에 나는 쇳물에 들어가는 사람 입장은 모르겠고 관료에 동일시합니다.


결국 노쎔은 사포를 구해와서 그 위에 빨간 크레파스 재질로 글을 쓰는 파격 실험을 하는데 그게 제 취향에 딱 맞았습니다. 표지에 사포를 쓰다니.. 놀랍군!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새삼 깨달았지요. 이런 노쎔이랑 둘이서 하는 추가 작업을 문감독에게 넌지시 말해 보았더니,


"야, 네가 직접 책내는 무슨 1인출판사 대표도 아니고 그냥 도움줄만 한 캘리그래펴를 알고 있으니 필요하시면 알려주세요라고만 해! 디자인이야 출판사에서 진행하겠지. 캘리 받아도 디자인 팀에서 그걸로 진행 안 할 수도 있어. 그런데 당최 너무 과하게 네가 관여하는 것 같아! 출판사 부담되겠다."


아.. 듣고 보니 내가 부장님께 선을 넘었구나!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디자인 문제는 그만하자.



그럼 다음으로 추천사를 근사한 곳에서 받으면 좋겠다 싶어서 준비를 합니다. 철학과 교수님 한 분, 정신과 의사 매미 쎔, 정신분석가 염선욱 선생, 이재갑 선생님 우선 이렇게 요청드렸는데 여기 방송국 PD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분도 글을 좀 쓰는 양반이니 호주 이민자 관점에서 추천서를 부탁해 보자.


"선생님, 저 드림입니다."

"오, 드림 회계사가 어쩐 일로!"

"제가 출간 기회가 있어서 짧은 서평을 선생님께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자네 글 쓰나?"


유도하는 회계사로만 알고 계셔서 글을 쓴다는 것에 무척 놀라시더니,


"호주에서 그렇게 출판하는 경우들을 보니 초기 출판비용은 작가들이 내더군 특히 자네 같은 무명작가 책은 더욱 그렇지. 계약서에 얼마라고 하던가?"


헐...계약서는 아직인데ㅠㅠ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라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더니. 출판사에 돈을 줘야 하는구나! 만원에 천부만 찍어도 천만 원인데, 거기에 교정 비용이나 디자이너 비용 등등 하면 얼마가 나오려나. 2천이면 되려나? 그럼 호주 돈으로 2만 5천 불인데.. 엄마가 사고 친 것이 있어서 이달에 5천만원 보내드렸는데 여기서 또 2천 한국에 보낸다면 나는 이혼이다. ㅠㅠ


출판사에는 사정 사정해서 천만 원으로 어떻게 해보자고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정하고 그럼 만 5천 불을 아무도 몰래 구해야 하는 처량한 인생이 하루 아침에 되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돈에 치이고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해본 적이 없는 터라 더욱 막막했습니다.


그리고 천부를 찍었다가 반도 못 팔고 반송되면 그건 또 소각처리해야 하나? 아니면 내 소중한 마법책이니 호주로 컨테이너 배송을 해서 창고를 임대해야 하나.. 벼라 별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순간 그만두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 돈부터 차용할 곳을 알아보기로 합니다.


내 레고 장남감이랑 레어템 주짓수 도복 등등 싹 다 호주 중고나라에 팔면 천불은 될 테고 나머지, 만 사천불 중에 4천은 유도장 현금 유보금에서 가져오기로 합니다.


"김관장님, 우리 현금 유보금 수준을 500%에서 300%로 내리고 남는 현금은 각자 나누죠."

"저야 좋죠! 그런데 요즘 건물주 분위기가 안 좋은데 실탄 없어도 괜찮으시겠어요?"


출판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괜찮을 거라며 타이르고는 당신이 믿는 그 위대한 신에게 기도를 좀 꼭 부탁한다고 마무리했습니다. 그럼 만불 남았다. 은행에 있는 선배 누나에게 물어보자.


"누나, 만불만 개인 융자 하려면 어려운가요?"

"만불? 신용카드 하나 만드세요 회계사님~"

"오케, 근데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Credit check해도 나오지 않게요."

"너 이혼 준비하니?"


노사임당, 2024, 사랑이라는 착각


결국 출간을 포기하기로 하고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창피하지만 박영스토리 부장님에게 솔직하게 묻기로 합니다.



아오.. ㅜㅜ

그냥 첨부터 물어볼걸.. ㅠㅠ

PD님이 이상한 소리 하셔가지고 모양 빠져 죽겠네 TT



모두들 사랑하며

이만 총총


추신 1.

노쎔, 이제 새벽에 캘리 안 보내셔도 됩니다. 좀 쉬세요.


추신 2.

부장님, 쓸데없는 짓거리 그만하고 말씀하신 숙제 빨리 할게요.



노사임당, 2024, 사랑이라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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