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착각
시드니에서 홀로 정신분석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랑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읽는 한인을 시드니에서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난 10년간 단 한 명도 만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올린 브런치 글을 계기로 라깡을 읽는다는 시드니 분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급속도로 친하게 연락을 나누다 결국 단 하룻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저랑 같은 동네 옆 건물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점심 식사 약속을 했고요. 우리는 서로 짜기라도 한 듯 서로를 위한 책을 선물로 가지고 갔습니다.
정원장님께 받은 책은 무의식에 대한 것으로 심지어 제목이 "나를 다 안다는 착각"입니다. 제가 출간한 책 "사랑이라는 착각"을 염두하신 것은 전혀 아닌데 너무 공교로운 일이더군요.
원장님하고는 여러 가지로 공통점이 또 있어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마치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신한석 분석가님이 역시 제 글을 보시고 연락을 주신 이야기를 꺼내어 보니 갑자기 제 인생에 그토록 찾던 정신 분석가들이 기적처럼 들어오는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분석가가 되려는 열망도 분명 있지만 그보다 큰 것은 분석을 받음으로써 더 좋은 글, 새로운 기표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작가가 되는 것이 우선이긴 합니다. 그만큼 글 쓰는 것이 좋고 진심이라고 모두에게 설명드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 분은 기꺼이 도움을 주시겠다고 하셨지요.
정원장님께는 제 책을 다음 기회에 드리기로 했고요. 신한석 원장님께는 출판사에 부탁하여 어제 발송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감사하게도 서평을 받아서 이렇게 여러 분들께 올립니다.
<사랑이라는 착각>을 읽고 어떤 글을 써야할까 한동안 고민했습니다. 단순히 칭찬만이 가득한 추천사를 나열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단순한 에세이가 아닙니다. 이 책은 분석이라는 실재에 가서 닿고 싶지만 실패하여 결국 ‘환상’으로 회귀한 결과물이며, 이로 인해 겉으로 보이는 유쾌함과 달리 고통과 회한이 녹아있는 독특한 창작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처음 눈에 들어왔던 부분이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자상함보다는 엄한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말이 없을 때면 화가 난 듯 보이기도 했는데 그런 모습이 불안했던 나는 어려서부터 침묵이나 어색한 시간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개그 욕심이 커진 모양이다. 사람들이 웃고 분위기가 따스해지는 것이 좋아서 늘 사람이 모이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가 웃는 모습이 좋았다. 아버지를 웃게 하면 내 불안한 마음도 사그라지면서 안도감을 느꼈는데 문제는 이런 얄팍한 개그로 아버지를 진정으로 즐겁게 할 수는 없었다." p.14
이 글에서 작가가 언급하는 밝음이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작가가 직접 언급하듯, 남들을 즐겁게 만드는 성격은 불안에 방어하기 위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억에 의하면 불안을 유발했던 최초의 대상은 바로 아버지인데요. 유쾌한 성격이라는 것은 분명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방어적인 성격을 보인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지게 됩니다. 유쾌한 성격에 잘 웃어주는 상대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관계는 만들어내는 본인은 전혀 즐거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에는 진정으로 좋아서 그렇게 했다기보다 불안하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 존재합니다. 바로 ‘반복 강박’(compulsion de répétition)입니다. 그는 자신의 유쾌한 성격의 반복 강박적 특징에 대해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직접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장한 아들은 연애를 할 때 어떤 모습일까? 학대를 당해야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학대받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익숙한 상황이니까. 습관처럼 비굴하게 상대를 기분 좋게 웃겨주고 그렇게 웃는 상대를 보면서 가슴속으로는 그를 증오했다. 왜 먼저 날 사랑해주지 못하고, 먼저 웃어주지 못하는가? 그 상대는 다시 내게 아버지 모습으로 전이 되는 것이다." p.15
작가에게 타인을 웃게 만드는 것은 학대와 동일어입니다. 스스로를 학대함으로써, 자신을 웃음거리로 제시함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결말이 좋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작가가 직접 말하는 것처럼, 작가의 방식을 좋아해주는 사람과 관계가 이어지게 된다면 종국에는 상대방을 속으로는 혐오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정신분석가는 환자의 초자아의 권위를 물려받지만, 다른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신분석가로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즐거움을 느꼈다고 말하기보다는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정신분석가로서 저는 ‘정신분석적인 개입’을 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저자를 비롯하여,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사랑받기 위해서 굳이 남들을 웃기거나 자신을 낮출 필요가 없음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분명 이 책은 겉으로 보기에는 유쾌해보일지라도, 읽다보면 그 어떤 암담함이 표현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에서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정신분석에 기대보지만,
결국 실재에 가서 닿지 못하는 무력감이 느껴집니다.
다만 이 책을 지배하는 유쾌함이 무력함과 암담함을 감추고 있을 뿐이지요. 어쩌면 이 책 자체가 작가가 자신의 혹독했던 과거를 각색하여 타인들로부터 애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 드러내는 장치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 모릅니다.
이 책은 분명 애정을 갈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해왔지만, 끊임없이 실패한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버지였고 이후 수많은 여자들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단순히 웃고 즐길 수만은 없는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사랑받고 싶었지만, 결국 사랑받지 못했던 아이에겐 어떤 상처가 남았을까요?
저에게는 이 책이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타인이지만 정말로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보입니다.
저에게는 이 책이 해석을 요구하는 증상(symptôme)으로 보입니다.
해석은 정신분석가의 의무입니다. 정신분석가로서 의무를 다하고자 이 글을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서평이랑은 무척 다르다는 것은 저뿐 아니라 읽는 모든 분이 느끼셨으리라 기대하고요. 아무래도 저랑 이해관계도 친밀한 서사도 없는 분석가 입장이다 보니 그 누구보다 철저하게 유리창 밖에서 저를 지켜본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추신:
시詩를 흉내 내어 써본 아래 글이 시로서 어떤 가치가 있을지 궁금하여 여기저기 물었고 같이 정신분석 공부하는 동지에게 받은 평도 하나 추가로 아래 동봉합니다.
https://brunch.co.kr/@dreamhunter/268
예, 좋은 시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제 글이 시일까요?라는 질문에 답)
시로 기능할 만한 문장이 없다시피 한 것 같습니다. 시가 뭐냐는 물음은 우선 제쳐두고요.
이런 것도 시라고 할 수 있다면 모든 문장은 시가 될 수 있다는 테두리 안에서만입니다.
뒤집어 보면 시는 모든 것에 묻어 있을 수 있고 지금 시 아닌 것이 한때는 시였을 적이 있었다는 생각도 가능할 것입니다. 시(적 진실)은 쇄신되는 형태의 것인데 이 부분이 라캉의 이론과 긴밀(?)하게 겹쳐지는 구간이고 문학과 정신분석이 만나는 뭐 그런 지점 아닌가 싶습니다.
현대의 철학과 문학과 정신분석은 하나라는 어느 분 말씀을 저는 믿습니다. 심상치 않은 대목임을 느끼고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