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담화
1. 불혹不惑
마흔이 되면 혹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경지에 다가가야 한다는데, 공자님이 불혹을 논할 당시랑 지금이랑 평균 수명 자체가 다르니 어느 정도 Scaling 하지만 50을 바라보는 지금도 혹하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식욕이나 색욕 앞에서는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러다 최근 코비드에 드디어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며칠을 쉬었으나 여파가 괴롭힙니다. 운동량을 극한으로 줄였음에도 피곤함이 가시질 않고 무엇보다 입맛도 돌지 않으니 아름다운 여자 다리를 보아도 무덤덤할 뿐입니다.
지긋지긋한 성욕이 사그라져서 한 편으로는 기쁘지만 문제는 운동을 할 마음도 사라지고 글을 쓸 동기도 녹아버렸고 사는 이유도 잘 모르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회복하는 느낌이라 몇 주 지나면 어느 정도 예전으로 돌아가겠지만 이 사건을 기점으로 차분한 흰머리 어른이 된 느낌입니다.
40 중반이 넘으니 예전이랑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아무리 운동을 해도 성욕은 따로 채워야 했지만 지금은 죽도록 운동하면 성욕이 같이 해결된다는 장점이 있군요. 남자가 성욕이 없어지니 무척이나 차분하고 진중하게, 불혹하게 됩니다.
어리석게 날뛰던 그 시절은 결국 성욕 때문입니다.
코비드 덕분에 불혹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단한 공부를 통한 것은 아니고 몸이 병들고 약해지면 이루게 되는 경지입니다.
2. 유혹有惑
정신분석 기법에 꿈을 해석하는 것은 일부라 프로이트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 꿈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일을 해보았지요. <꿈의 해석, 1900>을 진지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시도해 보는 일이긴 합니다. 그때는 라깡 쌤 글을 읽기 전이라 꿈을 해석함에 "기의" (의미)를 쫓다 보니 늘 해몽 타령이 되었습니다.
칼 융 쌤도 꿈에서 보이는 이미지 그대로 분석하라고 하면서 프로이트처럼 '기표'를 쫓아가기 시작하면 해석이 산으로 간다고 등을 돌렸습니다. 기표보다는 기의에 집착하라는 말씀 같지요. 융 쌤 책 <꿈 분석/해석>을 사서 읽는 이유는 이런 반대쪽 의견을 직접 보고 싶기 때문인데요. 저는 아무래도 '기표'를 따라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인지라 꿈에서 나오는 '이미지'에 의미를 두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입니다. 눈에 보였던 꿈속 영상이 제 글에 가끔 영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고요.
성욕이 회복되는지 꿈속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날 향해 웃어주는 꿈을 최근 가끔 마주하는데요. 어제는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를 보았습니다.
단순히 극장에 앉아 화면을 보는 내용이 아니고 인태희 (이은주 분)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을 찾는 인우처럼 영화 속 그 버스 정류장을 계속 찾아가는 꿈입니다. 꿈에 깨서도 너무나 애절한 느낌이 들어서 어찌 이렇게 아름다운 꿈이 날 찾아오셨는가, 무슨 신비로운 서사가 있을까, 정신분석을 공부한다는 놈이 이상한 환상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꿈은 내게 그 어떤 예지를 주지도 못하며 그 안에 내용을 기표로서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개소리, 꿈 해몽이라고는 알지만 이은주를 향한 내 마음은 아직도 이렇게 남아 절 찾아 오십니다.
제가 출간한 책 <사랑이라는 착각, 2024, 박영스토리>도 결국 이은주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무리되는 것인데 이 달 말에 후배가 그 책을 가지고 시드니에 온다는 일정 때문인지 꿈속에서 미리 이은주를 만나 봅니다. 다시 불혹이 깨지고 말았네요.
유혹誘惑 아니 유혹有惑! 원점입니다.
3. 공모전
9월이면 글을 보낸 응모전에서 답을 준다고 했습니다. 시드니 수필 전, 외국 동포 수기 전 그리고 가장 기대하는 교모 스토리 공모전에서 답이 오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책을 출간했지만 삶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워낙에 무명작가이니 1쇄 천권은 벌써 잊혀 어딘가 책창고로 가고 말았습니다. 2쇄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인데 누가 대신 내 인생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내 책을 팔아야겠다 싶습니다.
영화사가 주최하는 교보 스토리 공모전에 당선되면 영화로 제작될 기회가 있다니 그곳에 보낸 <살인자 시리즈>뿐만 아니라 제 책을 다시 꺼내 보려 합니다. 몸이 회복되려니 다시 정신분석을 읽고 미뤄둔 시나리오 쓰기 공부도 시작하겠습니다. 낙방하면 의지가 꺾일 터이니 발표 전에 열심히 공부하려 합니다.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요. 내 글은 반드시 합격할 것이다. 그러니
매끄러운 개연성에 펄펄 살아 움직이는 말로 가득한 글을 써보자!
4. 바다 리뷰
시드니는 이제 슬슬 여름님이 오시고 계십니다. 북방견인 우리 루나는 죽을 맛이겠지만 지구가 공전하며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고국에 있는 친구 중에 셋이 이번에 큰 맘을 먹고 여름휴가를 떠났다고 합니다. 유부남들이 가족 없이 이렇게 휴가를 간다니 부럽고 기특한 일입니다.
다리가 있어도;
손이 있더라도;
문을 열고 집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없는 유부남 친구들이 어인 일인지 허락을 받아서 이렇게 자유로운 여행을 출발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친구들이 보내온 동해 사진은 여전합니다. 호주 바다랑 비교해 보면 색감도 테두리도 더 진합니다. 호주는 옅은 색채에 얄팍한 선율이라서 그 모습은 달달해 보이나 진한 맛은 덜합니다. 마치 푹 익은 고추장이 동해라면 시드니 바다는 달달하고 가벼운 초장 느낌을 줍니다.
바로 먹기에는 입에단 초장이 좋지만 다양한 음식에 넣거나 풍미를 더하려면 깊이 익은 시커먼 고추장이 필요하지요. 이제 저는 시드니에서 산 인생이 더 길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동해는 지금도 가슴속에 깊이 남아 향을 풍기고 있습니다.
5. Jury duty
Case-law를 기반으로 하는 호주는 배심원 제도 역시 발달해 있습니다. Written-law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수시로 법원에서 배심원으로 출석하라는 고지서가 날아옵니다.
대기업을 다닐 때라면 가볼 생각을 했겠지만 지금처럼 자기 사업을 하는 저로서는 하루라도 사무실을 비울 수가 없기에, 벌금 나오기 전에 면제 신청을 해야 합니다.
법정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강력 범죄자를 법원에서 마주하며 유능한 변호사가 판사랑 실랑이하는 모습 등이 펼쳐질까 싶어 궁금하기도 하지만 4주간 매일 법원으로 배심원 다닌다는 것은 고단한 이민자들에게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국도 점점 다문화 사회가 되면서 법 처벌이 강해져야 한다는 요구를 봅니다. 한국 드라마는 사회상을 2년 정도 선행 반영한다고 믿는데 법원이 제 기능을 못하거나 솜방망이 처벌을 한다는 의식이 강한지 사설 기관이나 개인이 복수를 하는 이야기가 자주 보입니다.
한국 법은 한국 문화가 녹아 있어 지금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놈에 정情이 법에도 있어서 인간을 교정시키는 것이 목표이니 처벌은 최소한으로 하는 듯한데요. 시드니는 아무래도 한번 어긋나면 칼같이 값을 치르는 식으로 어찌 보면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체계입니다. 장단이 있겠고 문화 차이도 있어서 쉽게 어느 쪽이 맞다 못하겠습니다.
한국은 형법이 아니라도 집에는 매질을 하는 폭력 아버지가 상주하고 학교에 가면 교편이랍시고 채찍질을 하던 선생들이 살았으며 선배가 후배를 때리고 군대 선임이 후임을 구타하는 사회로 심지어 회사에서도 윗사람에게 맞았다는 친구 증언도 있으니 평소 나를 옥죄는 것이 충분해 법 처벌은 덜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호주는 최대한 일상 자유를 주다가 그에 어긋나면 대법관이라도 교통 법규 위반에 위증으로 징역을 사는 엄정한 곳입니다. 한국처럼 동네 면장 빽이라도 있으면 법을 융통성 있게 피해 가는 나라랑은 차이가 크지요. 그래서 막 시드니에 온 한인들은 이런 法문화에 숨 막혀합니다. 정이 없다고도 하고요.
이제는 그만 회복해서 코비드 전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내 의식이란 이렇게 연약해서 몸이 조금 변하니 삶이 흔들흔들합니다.
이토록 글이 흐물거립니다.
시드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