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eamHunter Nov 26. 2024

시드니에서 유도하기

GOOD THINGS TAKE TIME..

십 년 전 즈음 시드니 한인 청년 사업자 모임에 영업이나 뛸 겸 나갔다 동갑내기 친구 한 명을 만났습니다. 시원한 성격에 나이도 같았으니 금세 친해졌는데요. 낮에 운영하는 사업장 말고 저녁에 주짓수 체육관을 운영한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주짓수라는 운동이 생소해서 뭔가 싶었는데 운동을 좋아하는 저이기에 친구 도장에서 바로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시작한 유술에 대한 관심은 유도로 넘어오게 됩니다. 냉랭한 시드니 겨울 백인 검은 띠들이 즐비한 유도장에서 검은 머리 흰띠가 동양 무술을 배우는 그 광경이 스스로도 진기했습니다. 유도를 하는 한국 이민자나 선수 출신 유학생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뭉치지 못하니 이렇게 호주 도장에 뿔뿔이 흩어져 코칭을 하거나 회원으로 각자 도생하는 것도 보게됩니다.


한인들이 모여서 유도를 하면 좋겠다 싶은 마음에 호주 도장에서 알게 된 선출 코치 한 명이랑 유도장을 만들어서 운영해 온 것이 지금까지 제 삶에 큰 줄거리입니다. 유도를 하면서 다시 주짓수도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친구들도 만나고 나랑 기질이 너무 다르기에 등 돌린 적들도 많고 온갖 양아치 질을 몸소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자잘한 서사는 가끔 소설 식으로 쓰는 제 시리즈 글에 쏠쏠한 소재로 쓰이지요.


유도나 주짓수를 하기엔 적합한 나이는 아니지만 아무리 다치고 힘들고 데여도 꾸준히 하다 보니 코칭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수 출신도 아니고 생활 체육인으로 1급 선수도 아니니 가끔 덤비는 후배들이나 코칭이 뭐 그따위냐며 비웃는 회원들에게는 무어라 답변하지 못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유도 초자아, 대타자가 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조준호 & 조준현 선수 시드니 세미나 2024


그래서 제가 쓰는 방식은 유명 선수나 코치들이 내게 전수해 준 것을 이용합니다. 내가 대타자로서 권위가 없으니 수업을 진행하기 힘듭니다. 그러니 이렇게 나라는 대타자에게 힘을 줄 또 다른 대타자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에서 흔히 말하는 "대타자의 대타자"입니다.


조준현 선수가 그러는데 아래로 누르래. 조준호 선수가 그러는데 이렇게 하래.


내가 진행하는 수업 시간에는 대놓고 자기들하고 싶은 것들 옆에서 따로 진행하고 모여서 잡답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래도 나를 존중해 주는 회원들은 나만 보고 있는데 따로 노는 친구들을 멈추지 못해, 멍하니 그들이 닥치기만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 초라합니다.


한국 선생님들 교권이 바닥이라 학생들은 대놓고 이부자리 깔고 수업 시간에 잔다는 이야기에 선생님들이 몹시 자존심 상한다는 인터뷰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mz들은 우리 X세대랑 다르기에 매로 다스리거나 엄하게 소리치며 훈육하면 꼰대 소리 듣거나 다들 보따리 싸서 다른 도장으로 가겠다고 협박이 바로 튀어나오기에 제가 닥치고 조용히 학생들이 잡담을 멈출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요.


이런 치욕도 내성이 생기지는 않지만 어차피 나는 스승보다는 이 클럽을 운영하는 사업자이기도 해서 그들은 내 제자이며 후배이지만 엄중한 고객입니다. 주니어들 경우에는 부모님들도 추가로 고객이 되기에 유치원을 운영하며 속 썩는 삼촌 삶도 스치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이제는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다들 오래가지 못하니까요.


후배들을 지도하다 보면 종종 놀라운 재능을 보이는 친구들을 마주합니다. 나는 없는 재능을 가졌으며 나이도 20대이니 대견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며 이런 애들은 어디까지 성장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우와, 너는 1년만 하면 나를 능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수층이 얇은 시드니에서 주대표는 하겠는데?"


하지만 주짓수랑은 다르게 유도를 꾸준히 오래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날 욕해도 좋으니 꾸준히 나와주면 아름답겠지만 마음은 있으나 몸 상태가 따르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고 그 반대 경우도 많으며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지역 이동하여 헤어지는 후배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불만이나 아쉬움을 먼저 말씀드렸으니 지금부턴 왜 이 일을 계속하는지를 말씀드려야겠네요. 이런 고충을 한 번에 녹이는 것은 날 대타자로 여기며 도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후배들 모습입니다. 수의사, 마트 사장, 건축 설계사, 공무원 등등 각자 자기 삶을 영위하지만 유도라는 공통 분모로 내가 마련한 공간에 정을 주고 찾아오는 그 후배들 모습을 보면, 그날 수업에 그런 친구가 단 한 명 일지라도, 운영하며 얻은 피로감 돈 문제로 인한 불안 등이 씻은 듯 내려갑니다.


마치 창세기에서 타락하고 속 썩이는 소돔을 멸하기 직전에 여호와가 의인 한 명만 그곳에 있어도 파멸은 재고하겠다는 말씀이 이런 기분일까 합니다. 나랑 같은 마음, 비슷한 기질을 가진 눈동자 하나를 어두운 세상에서 찾아 함께한다는 즐거움이 이토록 큽니다.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개역개정)


벨트를 이용해서 스피드를 올리는 훈련, 도와주는 사람 지겨움 주의


호주에서 유도를 시작했기에 한국에서 슬쩍 경험하던 유도랑 다른 점이 보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 유도는 다른 지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이랑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가진 문제 때문에 촉발하는데요. 무엇보다 창시자인 가노 지고로 선생 사진을 걸어 놓고 운동 전후에 절하지 않으며; 유도 국제 용어인 일본어를 모두 자국어로 번역해서 씁니다.


이러하니 유도를 국기國技로 지정해서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는 일본 입장에서는 한국 유도가 미울 수밖에 없겠네요. 올림픽 종목에서도 육상이랑 수영을 제외한 단일 종목으로 유도는 레슬링 다음으로 많은 메달 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펜싱 같은 무체급 경기에서나 있어야 할 단체전을 억지로 유도에 도입시킨 힘만 보아도 일본이 올림픽 협회에 얼마나 돈을 투자하는 지를 대략 가늠해 보겠습니다.


일본 만화는 왜 백인들이 주인공일까 궁금했습니다

일본 유도 협회가 원하는 것은 노랑머리 백인들이 흰 도복을 입고 유도를 하는 모습입니다. 왜놈들 입장에서는 못사는 나라인 몽골이나 한국 유도 선수들이 유도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한국은 가노 지고로 선생을 위해서 올리는 제사여야 할 유도를 지들 마음대로 절차를 바꿔서 진행하는 상황이 괘쌤해 죽을 지경입니다. 이건 저같은 친일파가 아니라도 이해하실 겁니다.


아마도 오랜 시간 백인들을 통해서 받은 과학이나 서양 문물로 재미를 보아온 일본 사람들에게 노랑머리는 대타자로 자리매김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본인들이 대타자로 섬기는 백인들이 유도를 진지하게 하는 모습을 마주함에 강력한 오르가즘을 느낄 것이 뻔합니다.


호주는 백인 국가입니다. 그래서인지 호주 유도 협회는 지리 멸렬한 국제대회 성적에 비해 막대한 자금을 운영합니다. 당최 이런 돈이 어디서 나오는가 싶은데 아마도 일본 유도 협회에서 지원이 있을 것입니다. 시드니가 수도인 NSW 주를 뺀 나머지 주에서는 내가 유도장을 오픈하겠다면 유도 협회에서 구청이나 학교에 무료로 장소를 대관해 주며 비싼 유도 매트 지원뿐 아니라 회원들 도복까지 무상 제공합니다. 그 출처는 호주 혈세가 아닐 것입니다.


저 호주 아저씨도 블랙 벨트 받고 지금은 코치하는 듯..

최근에 백화점에 도장을 입점하는 일을 진행 중입니다. 상대 변호사가 만든 계약서에 만능키가 있습니다.


"건물주가 원하셔서.."


이렇게 시작하는 문장은 법이며 토를 달수가 없습니다. 건물주가 조물주랑 동기 동창이라더니 임대 계약서를 보면서 그게 농담이 아님을 절감합니다. 아무리 개같은 조건을 내세워도 '건물주가 시켰어'하면 나도 모르게 꼬리를 내립니다. 이렇다 보니 본 적도 없고 어디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건물주는 나에게 대타자가 되어 가다 못해 신비한 느낌까지 줍니다. 어디 하늘 높은 구름 위에 앉아 계실듯한 환상이랄까요.


그쪽 변호사 말로 건물주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나를 돕기 위함이며 자네가 하는 사업이 잘되기를 누구보다 원하고 지원하련다 말합니다. 실제로 몇 번 도움 받았습니다. 그것을 잊지는 않았지만 그가 세운 건물 속 세계관에서 그가 지정한 율법을 여의치 못한 상황에 어기거나 양해를 구하려는 순간에 건물주는 무서운 심판자로 변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불꽃과도 같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도 같다. (예레미야 23:29)


아무리 제가 회계사라지만 백화점이랑 그 법률 & 건축 팀을 상대하는 개인이다 보니 머리털 빠지는 일입니다. 이번 계약 끝나면 유도 은퇴하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치고 옵니다. 시간은 가는데 은행 담당자는 휴가를 즐기고 있고 독일에서 수입한 유도 매트는 항만에서 날 부르고 있으며 건물주 변호사는 왜 요청한 서류가 오지 않냐고 흑화하려 합니다.


집에 가서 이제 막 태어난 아이 얼굴을 보아도 임대 계약서가 아른 거립니다. 계약서만 끝나면 끝인가요? 이제부터 장사 시작입니다. 그 막대한 임대료를 유도라는 비인기 종목으로 벌어 메꿔야 하니 산 넘어 산이네요. 이렇게 급한 내 맘이랑 다르게 느긋한 주변 사람들은 지금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체감하지 못하기에 외로움도 커집니다. 그러다 시드니를 방문하신 장모님이 정성스레 차려주신 아침 밥상에서 계피 버터 뚜껑에 적힌 기표가 날 위로합니다.



GOOD THINGS TAKE TIME (가치 있는 것을 얻으려면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GOOD THINGS TAKE TIME


추신:

실은 제가 지금 분을 삭히다 삭히다 이 글을 씁니다. 마지막으로 은행 서류 하나만 넣으면 끝나는 임대 계약서인데 도통 은행 직원이 기다리라 기다리라만 반복하기에 견디다 못해 쫓아 갔더니 휴가로 없고 다른 매니저 통해서 일을 진행하고 왔습니다. 기다릴 상황이 아니고 추가로 더 일을 했을 상황이네요. 맘 같아서는 휴가 오는 것에 맞추어 다시 방문하고 싶어요.


"매저님, 우리 변호사 시켜서 당신 고소하려고요. 당신이 문자로 기다리라고 했던 것이 그대로 지금 전화기에 있어요. 당신 때문에 건물주 변호사에게 센타 까이고 우리가 손해본 금액 모두 청구하려합니다."


에휴..

이렇게 글 하나 쓰고 삭혀봅니다.

이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