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위로는 환상 속에서만 가능하니
내 사업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아시는 작가님들은 아시겠지만 시작부터 굴곡이 많았는데 이제 조금 자리 잡는가 싶더니 다른 일들이 터져나 온다.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것이 이런 때 어떤 도움이 될까 글로 정리해 보는데 과연 도움이 되려나 싶다.
1. 빚쟁이
평소 사이좋게 지내던 차선배가 돈을 갚지 않기 시작했다. 같이 진행하는 자그마한 협회가 있어서 매달 차선배가 주는 돈에 내가 더해서 꾸려가는데 차선배 요즘 주머니 사정이 궁색한지, 현금 흐름이 문제가 생겼는지 이도 저도 아니면 내가 뭔가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보였는지 지난달부터 지급해야 할 돈을 미루기 시작했다.
차선배가 지급을 미루면 내가 온전히 부담해야 구조라, 아내에게 눈치가 보이고, 속은 곪을 데로 곪아가지만 묵묵부답이다.
"형님, 이 번달 꼭 좀 부탁 좀 드릴게요."
간곡히 사정해도 '드림 회계사 딸아이 줄 선물 내가 챙겼어요!' 이런 식으로 딴청 부린다.
벤츠 타는 형이 소나타 모는 동생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서운하지만 한편으로 차선배 역시 나에게 돈 밀리고 빚독촉을 듣는 것이 좋을 리 없다. 아마도 그 사람 무의식에 있는 더 중차대한 일이 나에게 지급하기를 영 꺼리는 모양이다. 내게 밀린 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겠지. 나랑 어색한 관계를 만들어 얼굴 붉힐지언정 돈 주는 것보다는 남는 장사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2. 참견러
평소 얼굴만 알고 지내던 용사장이 새벽에 문득 연락이 왔다. 나하고 개인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닌데 무슨 급한 일인가 싶어서 전화해 보니 평소 내가 사업 운영하는 꼴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시비를 건다.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시정을 하겠고 오해가 있으면 풀자고 했으나 "됐고" 싸우고 싶단다. 나는 이미 용사장에게 악인으로 규정되어서 아무리 자초 지종을 이야기해 봐야 계속 처음으로 질문으로 돌아간다.
"과거에 잘못하셨잖아요? 그렇죠? 지금 바로 잡았다고요? 그래도 과거는 과거니까 벌 받으셔야죠!"
아무리 사소한 잘못이라도, 그 안에 고의성이 있던 없던, 잘못은 용서할 수 없으며, 사업 중에 일어난 잘못은 사기이니 만나서 현피 뜨잔다. 결국 다음 달에 만나기로 했다. 사람들 앞에서 보자니 진짜로 주먹다짐을 하기보다는 동네 창피하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날 망신 주고 싶어 잠이 안 오는 모양이다.
뭐가 우리 용사장님을 이렇게 분노하게 하는지 짐작은 하지만 이미 다 해결된 일인데 더구나 지금 와서 이런다고? 내 사업이랑 상관도 없는 3자가 무슨 참견이 이렇게 심한가! 스스로도 '제가 좀 오지랖이죠? 저도 알긴 하지만 이건 못 참아요!' 하는 것으로 보아 이것도 의식보다는 무의식이 저지르는 일이다!
무의식에 억압된 무언가가 내 모습을 몸에 자극받고 발현되어서 세상에 나왔으니 그를 미치게 만드는 모양이다. 이러니 아무리 의식 상황에서 진중하게 설명해 보아야 의미 없음을 알아 나는 더 이상 설명을 포기한다.
나를 자기 방식으로 응징하는 것이 그 안에 무의식이 원하는 일이다. 어쩌면 지난 과거를 애도하는 의례이자 절차 인지도 모른다. 사람들하고 싸우는 것이 자기 증상이라고 용사장 지도 평소에 말하고 다니며 조심하지만 개가 똥을 끊지 무의식에서 증상처럼 시비가 올라오면 또 눈이 뒤집힌다. 이 꼬임도 풀 재간이 없다.
3. 양아치
운동 마치고 저녁에 집으로 차를 모는데 뒤에서 누가 욕지거리를 심하게 해댄다. 처음엔 길거리 부랑자가 술이나 마약에 취해 떠드나 싶었는데 내 바로 뒤에 붙은 낡은 호주 차 홀덴에서 어떤 백인 남성이 지랄 지랄 난리가 났다. 좌회전 신호에서 대기 중이라 어차피 가지도 못하는데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자기는 내릴 생각이 없으면서 소리치고 내려서 한 판 붙자고 난리통이다. 가뜩이나 요즘 울고 싶은 데, 마침 이 아저씨가 따귀를 치는구나 싶어서 이 악물고 내릴까 하다가 이 나이에 유도 코치가 길거리에서 싸움이나 한다니 우리 학생들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행여 이 소문이 나면 면이 서질 않는 일이다.
태권도 코치질 하던 시드니 연속 살인마 류광경이가 떠올랐다. 원체 이상한 놈이긴 했지만 사람이 사고 치는 것은 한순간이 아닌가 싶다. 막상 차에서 내렸는데 호주 놈이 대쉬 보드에서 총이라도 들고 나오면 그때는 내가 빌어야 하나? 그러다 길거리에서 칼 맞으면 누구에게 하소연하겠는가?
반대로 내가 저 인간을 신나게 유도 기술로 업어 치고 매치고 두들겨 패면 누가 상 주려나? 그냥 류광경 two 되는 것이다. 한인 유도 코치 코리아 타운에서 호주 남성 폭행! 다음 날 교민 신문 헤드라인이 지나간다.
4. 목사님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이런 사소한 채무 관계, 참견러, 양아치들 문제는 프로이트 박사님이면 어떻게 하셨을까? 긴 스토리 전개에 비해 건질 거라곤 군대 된장국에 고기 건더기 만도 없는 이런 자잘한 일들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면 좋을까?
이제 부모님은 50 먹은 아들 뒤치닥 거리 하시기엔 너무 늙으셨고 친구들은 고국에 있어 이 상황을 다 이해하지 못하니 어디 가서 말할 곳도 없이 그냥 속으로 삭이고 참고 넘기를 되풀이하는데 평소 내가 따르던 목사님이 마침 시드니를 방문하셨다고 연락이 왔다. 이제는 그 어떤 신도 모시지 않는 유물론자이지만 그래도 목사님에게 고자질해 보자. 목사님은 내 편이 되어 주시리라!
내가 대학교 막 졸업하고 어디 국회의원 보좌관실에 막내로 들어갔을 때야. 스무 살 초이니 오래전 이야기인데 나름 국회의원실에서 일하니 기대도 컸지만 막상 하는 일이라고는 동네 주민들 민원 뒤처리야. 살면서 당하는 불편한 민원이나 어디 판을 벌이기 뭐 한 사소한 송사 따위를 국회의원에게 들고 와서 해결을 부탁하면 그중에 작은 거는 막내인 내가 일임받아서 구청이고 관공서고 돌아다니면서 그 일을 해결해 줘야 하는 거지.
헌데 이게 여간 귀찮고 짜증 나고 번거로운 게 아니야. 더구나 남들 송사에 3자인 내가 나서는 거니까. 하루는 이런 일에 너무 지쳐서 인상 확 쓰면서 화장실에 서있는데 내가 모시던 그 양반이 지나가다 "어때 일해보니, 힘들지?" 하며 어깨를 치시더군. 내가 울상으로 힘들어 죽겠다고 하자 "이보게 세상에는 '신세 법칙'이라는 것이 있어" 하시더구먼.
내가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고 신세를 지면 말이야. 그건 그것대로 또 서사가 되는 거야. 내 부탁을 들어준 사람은 어디 가서 그걸 뽐낼 게 분명하거든. 그러면 그 사람은 나로 인해서 자랑 거리가 하나 생긴 거야. 그 자랑 거리는 그 사람을 만드는 인격이 되고 자네는 그 사람에게 오히려 서사를 만들어 준 인물이라. 다음에 만나게 되면 반대로 그 사람이 자네를 반가워할 거네.
지금 자네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역시도 다 이 신세 법칙에 들어가는 거야. 자네에게 돈을 빌렸다던 선배도 결국 자네가 한결 같이 협회를 잘 운영하면 그 사람이 가슴 펴겠나, 자네가 당당하겠나? 친한 선배 술도 사주는데 그 돈 가지고 너무 상심하지 마시게. 그 선배는 돈 갚을 때까지 두고두고 자네 볼 때마다 신세 지는 겪이니.
용사장이란 놈도 그래. 왜 지나가던 길이나 가지 지가 뭐라고 남 사업에 감놔라 배놔라야. 또 시비를 걸면 변호사 통해서 편지 한 통 보내 봐. 한 번 더 사람 귀찮게 하면 무고죄나 공갈로 코트에서 볼 수도 있다고 따끔하게 엄포를 놔. 그렇게 앞뒤 모르고 까부는 놈들은 또 법이라면 무서워하거든.
글을 마칩니다. 이 글도 쓸까 말까 고민을 했습니다. 내 잘못은 감추면서 주변 사람들을 내 관점에서만 편집해서 보시는 작가님들에게 함께 욕해달라는 부탁 같아서요. 이런 잡문을 쓰라고 판을 깔아 놓은 브런치라지만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리기에 너무 얄팍하구나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쓰고 나니 많은 분들에게 위로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것도 환상일 텐데 결국 우리를 진정으로 애도해 주는 것은 실재가 아닌 환상이니까요.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아래 생략)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