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삶
제가 이 매거진에서 어떤 얘기를 하고 있냐고요? 엄마와 저의 삶이요, 시시한 삶. 우리의 시시한 삶에 뭐가 있냐고요? 사랑이요, 시시한 사랑들이죠. 그리고 열망, 시시한 열망에 대한 얘기. 저는 알아요, 시시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그래서 왜 이 매거진을 별로 읽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장 자끄 상뻬의 <풀리지 않는 몇 개의 신비> 속 구절을 제 마음에 맞게 바꿔 써보았습니다.)
[엄마의 시]
흡, 나도 모르게 꿈을 들이마신다
높이 쌓아 올린 짚단더미에 오르다 미끄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영락없이 불이 붙는 몸, 겨드랑에서 날개 솟고 휘융 나를 때 번번이 어린 나는 곤두박질한다 :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들 꾸는 동안 키가 많이 자랐다
갓 태어난 뽀얀 아기를 잡아먹은 검정 개 주둥이에 피가 철철 흐른다 넘친 핏물들이 싸리 울타리를 빠져나가자 바로 강물이 범람해 집안으로 들어온다 강물 위를 둥둥 떠 오는 두 사내 중 한 사람은 채권자라 말하는데 : 어른이 된 나는 정밀한 꿈 속에서도 결코 속지 않는다 채권자가 저승사자의 변신이라고 바로 알아차린다 이름을 호명해도 대답하지 않는다
흡, 때때로 꿈인 줄 알면서도 후속편까지 즐긴다 담배연기처럼 일부러 꿈을 빨아당긴다 상영 중인 영화는 총천연색이다가도 가끔 흑백무성 영화가 된다 필름이 끊어지고 자막 위에 쥐 오줌의 얼룩이 있다 빗금 치듯 빗물이 흘러내린다 선녀와 나무꾼이나 장화와 홍련처럼 주인공은 나 말고 대조적안 사람이 또 있다 그 누군가와 칼부림하다가도 마무리는 해피엔딩이다 : 끝까지 악몽이어야 제대로 꿈 값을 받을 텐데
꿈을 긁어댄다 간지럽힌다 꼬집는다 무릎 꿇린다 코너롤 몰아넣는다 꿈과 레슬링하고 씨름하고 격투하여 싸워 이긴다 화살처럼 그것을 쏘아 파랑새를 맞힌 다음 의기양양하게 그 목을 자른다 죽여버려도 죽은 그는 다시 살아나 나를 놀려댄다
흡, 다시 부서진 꿈의 먼지들, 햇빛에 반사되고 구석에 낄낄거리며 몰려다니는 그것들을 통째로 들이마신다 그의 깔때기 속에서의 참혹함은 참혹함이 아니다 꿈 속의 배반이 임신한 증오는 만삭 후에 현실에서 사랑을 낳는다 점점 혼돈에 빠지는 건 꿈조차 꾸지 않는 현실이다
케액, 너를 기침으로 뱉어내고
어지러운 현실을 꿈으로 땜질하려 하나
참한 악몽 꾸지도 못하고
아직 개똥밭을 굴러다닌다
어디 멋진 악몽 파는 데 없을까
[딸의 에세이]
엄마의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그동안 보아왔던 엄마의 시와 다른 어떤 강렬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그러면서도 ‘개똥밭을 굴러다니는’ 엄마의 ‘어지러운 현실’이 느껴져 애잔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삶은 행복한 삶일까 불행한 삶일까. 그저 내게는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삶’이 ‘가능하지 않은 삶’처럼 여겨질 뿐이다.
지독한 악몽으로 꿈땜을 하고 나면 팍팍한 현실이 조금은 더 나아지려나.
그러나 현실은 꿈조차 꾸지 않으니, 악몽 같은 현실에서, 그저 살아남는 거다.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일으켜 세우며 살아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