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나물이 책나물이 되기까지
퇴사하고 출판사를 차려야지, 마음먹고 나서 제일 간단하면서도 제일 어려웠던 게 ‘출판사 이름 정하기’였다. 출판사를 등록하는 과정 자체는 간단하다. 출판사는 나라에서 ‘허가’해주는 개념이 아니라 ‘신고’하면 되는 거라서 해당 구청에 가서 하면 된다.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문화체육관광부의 출판사인쇄사 검색시스템(
http://book.mcst.go.kr/html/main.php)에서 미리 검색해서 자신이 하려는 이름이 이미 등록되어 있는 게 아닌지 체크하는 게 좋다.
퇴사하고 출판사를 차릴 거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이름은 정했어?” 묻고는 했다. 어떤 이름인지 정해야 하는데.... 머릿속에선 이런저런 이름들이 후보군(?)으로 많았다. ‘책나물’로 정해지고 ‘책나물’이 익숙해진 지금은 다 어렴풋해진 이름들인데, 그중 몇 개를 떠올려보면....
글빵집
오늘산책
책읽는순간
순간의기쁨
흰종이에까만글씨
화룡책방
흐흐
아무러하다
매일휴일
휴덕
메롱출판사
사실 수십 개가 있었는데.... 지금 떠올리려니 안 떠올라서 예전 메모 찾아봐야 했다. 이들 중 ‘아무러하다’는 20대 때 사전에서 발견하고 좋아했던(?) 단어이다.
아무러하다
「1」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은 어떤 상태나 조건에 놓여 있다.
「2」 ((‘아무러한 …도 않다/없다/못 하다’ 구성으로 쓰여)) 어떤 것에 전혀 손대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3」 ((‘아무러하게나’ 꼴로 쓰여)) 되는대로 막 하는 상태에 있다.
언제 ‘책나물’이라는 이름이 내 속에 들어왔을까. 2020년 12월 회사에 퇴사를 얘기하고 2월 말까지 다니고 2월 월급(월급날은 매달 25일이었다)을 받은 뒤 2월 26일 금요일, 미루지 않고 바로 출판 등록을 하러 가야지 했다. 그런데 2021년 2월 26일은, 음력 정월대보름인 거다. 나물 먹는 날. 그래, 그럼 책나물로 하자! 하면서 마음이 확실해졌다ㅎㅎㅎㅎ
부르기(발음되기) 쉬운 이름, 기억하기(기억되기) 쉬운 이름, 나(?)랑도 어울리는 이름으로 출판사 이름을 정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나물을 좋아했다. 깻잎, 미나리, 두릅, 겨자 상추, 루꼴라, 고들빼기.... 생각나서 적는 푸르른 이파리들(?)은 다 내 입에는 맛나다. 나물 반찬을 실제로 해 먹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나물은 다듬고 씻고 데치고 무치고 꽤나 수고로운 손길을 거쳐 겨우 한 접시 탄생하기도 한다. 그렇게 정성 들여서 한 권, 한 권 내고 싶은 마음을 담기도 했다. 책나물이라니, 어쩐지 촌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나는 촌스러운 걸 좋아하니까(?), 허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나물’은 ‘한국문학’을 지향하는 출판사의 맥락과도 닿아 있는 것도 같고, 하면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출판사 이름은 ‘책나물’로 확정했다. 튀거나 요란하지 않지만 어쩐지 우리 곁에서 쭈욱쭉 오래오래 남아서 우리의 몸과 마음의 건강에 도움을 주는 나물, 같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지향점도 담아보고. 자극적인 맛보다 고유의 맛을 살려 질리지 않는 맛, 그런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도 담고. 책 + 나 + 물....인데, 책과 물 사이에 ‘나’가 있는 것도 맘에 들고. 중학생 때인가, 도덕 교과서에서 ‘상선약수’란 말 보고 좋아했던 사람으로서ㅎㅎ 사주오행(?)에서 또 나는 ‘물’인데 하면서.... 암튼 ‘책나물’이란 말에 꽂히고(?) 나서 이것저것 의미 부여를 해보고는 했다. 다행히 ‘책나물’이란 이름으로 등록된 출판사는 없었다.
실제로 퇴사 마무리는 3월 25일 자로 되었지만, 2월 26일(금), 마음먹었던 대로 출판사 등록을 하러 갈 수 있었다. 출판사 등록을 마치고, 며칠 뒤 사업자 등록을 했는데, 설립일은 3월 8일로 했다. 어쩐지 세계 여성의 날인 그날을 책나물의 시작일로 하고 싶었다.
메일,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각종 계정의 아이디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책나물’을 영어로 하면 뭐가 될까? herb + book 으로 생각해 herbook 으로 할까? 그녀의 책, 이라는 뜻도 되겠고. 그러나 herbook은 ‘책나물’이란 이름을 덜 드러내주는 느낌이었다. 또 나물과 허브는 다른 느낌이고. 그래서 나물은 한글 발음을 그대로 표기해, booknamul을 아이디로 삼았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나니, 운영자인 나의 이름도 있어야 될 것 같았다. 편집자 누구입니다~ 할 때의 이름. 책나물이란 출판사 이름답게 나물 이름으로 하고팠는데, 언니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봄동’을 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봄동은 배추의 한 종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찾아보니 ‘노지(露地)에서 겨울을 보내어, 속이 들지 못한 배추. 잎이 옆으로 퍼진 모양이며, 달고 씹히는 맛이 있다.’라고 했다. 겨울철, 노지에서 보낸 배추라니! 그 추위 속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했음에도 그렇게 맛있다니! 어쩐지 고단한(?) 삶 속에서도 잘(?) 자란 내가 오버랩되었다ㅋㅋㅋㅋ 그렇게 나는 ‘봄동이’가 되었다.
나는 책나물이란 이름도, 봄동이란 이름도 제법 마음에 든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