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에서 드러난 인간 본성의 민낯
핵전쟁이 벌어져 어디에선가 원자탄이 터지는 위기 상황 속에서 한 무리의 영국 소년들을 안전한 장소로 후송하는 공수작전이 전개된다. 하지만 비행기는 명시되지 않은 적의 요격을 받고는 격추된다. 소년들은 비상 탈출해 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다섯 살에서 열두 살에 이르는 소년들은 열두 살 ‘랠프(Ralph)’를 지도자로 삼아 생존을 위한 조치들을 제법 요령 있게 진행한다. 산정에 봉화를 올려 구조신호로 삼는 신중성도 발휘한다. 성가대 연장자 ‘잭(Jack)’이 불 관리를 자청한다.
잭과 랠프 사이에 의견이 대립하면서 소년들은 분열한다. 랠프는 바닷가에 오두막을 세우자고 제안하고, 잭은 사냥을 강조한다. 이 와중에 잭과 사냥 패들은 멧돼지를 잡아 크게 위세를 떨친다. 랠프의 지도력이 약화되자 그를 따르던 새끼 돼지라는 별명의 근시 소년 ‘피기(piggy)’는 잭에게 뺨을 맞고 그 바람에 안경 한 알이 깨어진다.
랠프는 다시 회의를 소집해 봉화의 철저한 관리와 오두막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잭을 우두머리로 한 사냥 패들은 이에 반대한다. 그때까지 소라를 쥔 사람이 발언권을 가졌는데 그런 관습도 잭에 의해서 무시된다.
죽은 낙하산병을 목격한 꼬마들이 무서운 짐승을 보았다고 얘기를 퍼뜨리는 바람에 무리 전체가 동요하자, 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랠프는 수색대를 조직한다. 그들은 산 정상에서 낙하산병의 시체를 보고 질겁해서 도망친다.
이제 랠프와 잭의 결별은 분명해 보인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고기 맛에 끌리어 잭의 사냥 부대에 가담한다. 잭은 사냥 부대를 이끌고 멧돼지를 잡아 그 머리를 막대에 꽂고는, 그들이 두려워하는 짐승에 대한 제물로 숲 속에 남겨놓는다.
더위에 녹초가 된 암퇘지는 쓰러졌다. 소년들은 마구 덤벼들었다. 이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무시무시한 습격에 암퇘지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 비명을 지르고 뛰어오르고 했다. 온통 땀과 소음과 피와 공포의 난장판이었다. 로저는 쓰러진 돼지 주위를 달리며 돼지 살이 드러나 보이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창으로 찔렀다. 잭은 암퇘지를 올라타고 창칼로 내리 찔렀다. 로저는 마땅한 곳을 찾아서 제 몸무게를 가누지 못해 자빠질 정도로 창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창은 조금씩 밀려들어가고 겁에 질린 돼지의 비명은 귀 따가운 절규로 변하였다. 이어 잭은 목을 땄다. 뜨거운 피가 두 손에 함빡 튀어 올랐다. 밑에 깔린 돼지는 축 늘어졌고 소년들은 나른해지며 이제 원을 풀었다.
잭은 잔치를 열고 랠프와 다른 소년들을 초대한다. 잭과 패거리들은 사냥꾼으로서의 자기들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춤을 추면서 주문을 외운다. 이때 그들을 겁에 질리게 한 짐승의 정체가 사실은 낙하산병의 시체임을 알려주기 위해 나타난 ‘사이먼(Simon)’을 흥분한 상태에서 살해해 버린다. 마치 짐승처럼 도륙하고, 그의 시체는 바닷속으로 밀려 나간다.
사이먼은 산 위에 있는 사람의 시체에 대해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 ․ ․ ․ )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 그놈을 죽여라!
(․ ․ ․ ․ ․ ) 그 짐승은 원형의 한가운데서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짐승은 고함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산에 있는 시체에 대해서 무어라고 자꾸만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짐승은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가 원형을 꿰뚫고 가파른 바위 끝에서 물가의 모래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곧 소년의 무리는 물밀듯이 그 뒤를 밟고 바위를 내려가 짐승에게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고 주먹질을 했다. 물어뜯고 살을 찢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이빨과 손톱으로 물어뜯고 할퀼 뿐이었다.
(․ ․ ․ ․ ․ ) 바다에서 불과 몇 야드 떨어진 곳에 짐승만이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조그만 짐승인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미 피가 모래를 물들이고 있었다.
(․ ․ ․ ․ ․ ) 짐승은 파르스름한 모래사장에 새우등을 하고 누워 있고, 핏자국이 조금씩 번져갔다.
(․ ․ ․ ․ ․ ) 밀물의 큰 물결은 섬을 따라서 점점 크게 밀어닥치고 물 높이도 점점 높아갔다. 꼬치꼬치 파고드는 발광생물에 둘러싸인 채 꼼짝 않는 성좌의 불빛을 받고 은빛으로 빛나는 사이먼의 시체가 서서히 난바다로 밀려나갔다.
이제 랠프 곁에는 근시 소년 피기와 몇몇 꼬마밖에 남아 있지 않다. 점점 더 흉포해지는 잭의 사냥 패들은 그들의 진지를 구축한다. 게다가 불을 피우지 못하도록 근시 소년의 안경을 훔쳐가 버린다. 안경이 없어서 불을 피울 수 없게 된 랠프와 피기는 잭이 있는 성채 바위를 찾아가 안경을 돌려 달라고 호소해 보지만 거절당한다. 랠프와 잭이 격렬하게 다투는 사이에 ‘로저(Roger)’는 바위를 굴려 근시 소년 피기를 죽게 한다.
이제 랠프는 도망쳐 숨어버린다. 드디어 오랑캐로 변한 잭의 사냥 패는 살의를 품고 수색에 나선다. 쫓기던 랠프는 돼지의 머리를 창에서 빼낸다. 랠프는 몇 번의 위기를 넘겨 가까스로 바닷가로 나오고, 연기를 보고 섬에 들른 영국 해군 장교에 의해 구출된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목메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인간 본성은 어둠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법이다.
사냥에 매료된 잭과 사냥패들은 스스로 오랑캐 즉 야만인으로 타락해 버린다.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아니라 자진해서 문명의 겉치레를 모두 던져버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조의 가능성이 옅어지고 두려움이 커지면서 그들은 결국 타락해 악마 즉 ‘파리대왕’이 되어 간다. 파리대왕은 헤브루어 베엘제버브(Ba' alzevuv, 희랍어 Beelzebub)를 번역한 것으로 ‘곤충의 왕’이란 뜻으로 악마를 가리킨다.
2021년 11월 22일.
그날, 1과 2가 연속으로 겹치는 그날, 나는 국민연금공단에서 해고됐다. 자그마치 26년 7개월 21일 동안 평온하게 다녔던 직장에서, 이른 성취와 빛나는 영광으로 점철된 화려한 시간들을 한순간에 박살 내며. 『파리대왕』에서 잭의 사냥패들이 사이먼을 잔인하게 도륙하는 방식으로, 나는 공공기관에서 잔인하게 추방당했다. 그건 분명코 야비한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이미 햇수로 4년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날 하루동안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내가 어떤 말을 내뱉었는지,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내가 두 발을 딛고 선 이 세상의 주위 풍경이 어땠는지, 이 모든 것들을 나는 분 단위로 잘게 쪼개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세상을 혼돈과 갈등으로 치닫게 했던 코로나19의 광풍이 여전한 2021년 그때, 공공기관이라는 번듯한 허울을 쓴 국민연금공단에도 '잭'과 '로저' 같은 어둠의 지배자들이 여럿 있었다. 언제나 그림자나 어둠으로 연결되고 도덕적으로 파렴치한데도 권력을 지향하는 늙은 여우 같은 인간. 충직한 하수인으로 늘 말없이 잔혹한 행동을 서슴지 않은 멧돼지라 불리는 인간, 온갖 협잡과 모함에 능해서 마치 비열하고 잔혹한 늑대 같은 인간. 달콤한 과실에 이끌려 사주의 유혹에 푹 빠져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아무 생각이 없는 인간. 믿음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서 푼의 권력에 아양을 떨며 양심을 팔아버리는 구질구질한 인간.
그날 하루는 참으로 길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2021년 11월 22일.
마지막 출근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섰고 느긋하게 기차 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허전함이 가득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는 마냥 쓸쓸해 보였다.
나는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쫓겨났다. 황망하고 부끄럽고 창피했다. 가족 볼 낯이 없었다. 조직에 헌신하느라 결혼 생활의 절반을 주말부부로 살았다. 가족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 ‘해고’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족한테는 해고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잔뜩 흐린 날씨.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낙엽이 이리저리 쓸려 다녔다.
나는 한없이 느릿느릿 걸었다. 첫걸음마 떼듯이 마냥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걸음걸음 옮기는 게 이리 힘든 일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저만치 보이는 건물에 선명한 로고. 탄탄한 연대를 상징하듯 두 손을 맞잡고 있는. 가슴이 먹먹했다. 연대가 아닌 배척, 포용이 아닌 추방인데 그걸 바로잡을 힘이 내겐 없었다. 무력감에 무릎이 푹 꺾였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내 사무실에 들어섰다. 적막했다.
누군가 침통한 표정으로 봉투를 건넸다. 그는 제대로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한 채 고개 숙여 어쩔 줄 몰라했다. 그는 분명 억울했을 터. 이런 악역을 담당할 줄은 꿈에서조차 몰랐을 것이다. 난처한 상황에 처했던 그가 늘 신경 쓰였다. 두 해 지나 해바라기 그림을 선물했다.
해고 처분 사유서!
내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종이를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해임’이라는 단어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상황은 이 보다 더 분명할 수 없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속이 마구 뒤틀렸다.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말 끔찍했다. 그때까지 막연했던 현실이 이제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확정임을 깨달아야 했다. 누르고 눌러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해임!
눈처럼 하얀 종이에 큼지막하게 쓰인 두 글자. 온갖 걸 경험하고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설마 이런 걸 받을 줄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직인이라 부르는 선명하게 찍힌 붉은 도장, 붉디붉은 피처럼 잔인하게 느껴졌다. 죄인의 이마에 낙인을 새기듯이 내 가슴 깊은 곳에 아로새겨졌다.
나는 이제 아무 쓸모없는 존재였다. 더 이상 머물 권리가 없었다. 더 이상 누릴 혜택도 없었다. 크고 듬직한 우산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그 많은 것들이 이젠 당연하지 않게 됐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 노무를 제공할 의무도 없다. 불명예를 가득 짊어진 채 떠나지만. 근 1년을 함께한 동료 직원들께 마지막 인사는 해야 했다.
나는 이메일을 보냈다.
『햇살이 곱고 따스한 가을. 뜻하지 않게 회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또 다른 시비의 우려가 있으므로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합니다. 어쩌다 우연한 인연으로 함께한 11개월의 시간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겁니다.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느끼려고 노력했지만, 능력의 한계와 어쩔 수 없는 제약으로 만족할 만큼은 수용하지 못했음을 인정합니다. 참고 견디며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저절로 마음과 몸이 움직이는 삶에서 즐겁고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주뼛주뼛하는 몇몇과 간단하게 악수한 후 밖으로 나왔다. 어스름이 짙었다. 세상은 온통 캄캄했다. 낙엽을 잔뜩 품은 세찬 바람이 거리를 휘몰아쳤다. 나는 옷깃을 여미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시끌벅적했다. 반가운 사람과 즐겁게 식사하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자연스레 수다스러울 수밖에.
출입문 바로 옆방에서의 어색한 만남!
그는 오후 두 시쯤 내게 문자를 보냈다. ‘그곳에 갈 예정이니 저녁에 시간 좀 내어 달라.’
나는 무척 의아했다. 징계를 주관했던 그가 전북에서 경남까지 오겠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일을 겪는다고 생각했다. 수십 년 역사에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오겠다는 데 굳이 말리고 싶진 않았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별다른 일정이 없다. 시간 괜찮다. 알아서 하라.’
그는 먼 거리를 혼자 운전해서 왔다. 족히 두 시간 이상 걸리는 멀고 먼 거리를.
식탁엔 맛깔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약속시간 보다 먼저 도착한 그가 주문한 대로. 둘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 그득했다.
침묵은 누군가와 얘기할 때 꼭 필요하다. 그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다음에 올 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가 두서없이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그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각자 하고 싶은 말만 내뱉었다. 대화는 마냥 겉돌았다. 이미 해임이 결정됐고 처분통보서도 받았으니 모든 게 다 끝난 상태였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설령 말을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부질없는 넋두리, 의미 없는 푸념이다.
한 시간이 흘렀다. 음식은 그대로였다. 몸에 슬픔이 가득 찼으니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갈 리 만무했다. 내가 먹지 않으니 그도 먹지 못했다.
그가 끝으로 한마디 불쑥 내뱉었다. ‘기관장과 임원께 할 말이 있습니까? 말하면 대신 전하겠습니다.’
나는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상황에서 전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내가 한마디 했다. ‘이곳에서 헌신한 수십 년의 시간을 후회한다.라고 전해 주세요.’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보탰다. ‘현명하게 처신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현명이라는 말에 발끈했다. 내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도대체 현명한 처신이 뭡니까?’
뜻밖의 말이 되돌아왔다. ‘여기서 포기하지 말고 외부절차를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하면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낙엽들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내 가슴 한편에 차디찬 공기가 불쑥 들이닥쳤다. 허무함과 쓸쓸함도 함께. 이 무슨 해괴망측한 괴변인가. 이 말을 해주려고 왕복 450km를 혼자 운전해서 왔단 말인가. 당체 이해되지 않았다. 평소 막역하게 지낸 사이도 아니었다.
그는 그 무리의 일원이었지만 결코 야비하지는 않았다. 평소에 그를 경계했지만 미워하거나 두려워하진 않았다. 인간적인 양심과 올바른 품격을 지녔으므로. 그는 단지 집행관이었다. 온갖 구실과 핑곗거리를 만들어 나를 기필코 조직에서 추방시키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늙은 여우의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는 허수아비. 공로연수를 앞두고 맞닥뜨린 이런 상황에 그는 무척 난감했을 터였다. 예의를 보여준 그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두 해가 지나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11월 22일. 1과 2가 연속으로 겹치는 날. 잊지 못할, 잊히지도 않을 날이지요. 2년 전 오늘, 전주에서 창원까지 멀고 먼 길을 찾아주신 귀한 발걸음을 오랫동안 고마움으로 기억했습니다. 고위간부의 품격을 온몸으로 보여준 그 마음을 오래 기억합니다. 늘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을 소망합니다.”
그는 사라졌다.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가을 끝자락, 바람이 꽤 매서웠다. 짜릿한 통증이 가슴을 훑고 스쳐갔다. 칼로 베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불현듯 아침에 받은 문자가 떠올랐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지사장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끝까지 힘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출근을 앞둔 지난밤, 나는 좀체 잠잘 수 없었다. 기관장께 긴 문자를 보내고 받은 답장이었다. 끝까지 힘을 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덕담인가. 하지만 다르게 보면 이 얼마나 비겁한 공치사인가.
"이 밤이 지나면 마지막 출근입니다. 26년 7개월 22일을 다녔는데 이런 모습으로 한순간에 떠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죽어서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족에겐 어떠한 얘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올해 일어난 모든 일은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당분간 창원에서 해고자의 신분으로 혼자 지낼 겁니다. 지난 금요일, 해임 통보에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틀 동안 가족과 지내며 몸과 마음을 조금 추슬렀습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이명과 공황장애 증상이 매우 두렵지만 마지막 출근은 문제없을 겁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퇴근하겠습니다."
짙은 어둠!
나는 무섭고 두려웠다. 혼자 남겨진다는 게 이렇게 무섭고 두려운 일이던가. 내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내 나약함을 온전하게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 내 문제는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걸 어려서부터 온몸으로 체득한 탓이었다. 나는 여태 그렇게 살았다.
나는 인적조차 없는 밤길을 정처 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여린 가로등 불빛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텅 빈 골목은 마냥 희미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득히 먼 곳에서 오느라 지칠 대로 지친 별들이 듬성듬성 박혀있었다. 시커먼 하늘에 가녀린 빛을 드리운 그들도 나처럼 처량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