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동백의 꿈은 봄 너머의 희망

by 자유와 예술

나는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나는 햇수로 이태 동안 해임, 3개월 정직, 좌천을 연달아 겪었다. 아버님께서 정성스레 지은 내 이름은 이름 모를 숱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처참하게 더럽혀졌다. 나는 마지막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저항하겠다고 다짐했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맞이한 2023년. 나는 무려 13개월 만에 예전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국민연금공단 창원지사장.


나는 대구와 창원을 매일 통근했다. 아침 6시 40분 기차로 출근했고, 저녁 6시 55분 기차로 퇴근했다. 저녁 9시쯤 지칠 대로 지쳐 집에 도착하면 곧장 헬스장으로 달려갔다. 1시간 이상 운동기구를 들고, 당기고, 밀었다. 나는 하루에 1만 보 이상을 걸으면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온갖 발버둥을 쳤다. 오기와 독기로 똘똘 뭉친 채 어떻게든 묵묵히 견디고 버티어야 했다.


매서운 추위가 한풀 꺾인 2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기차가 밀양을 지나면서 차창 밖 풍경이 확연히 달라졌다. 황량한 겨울을 상징하는 우중충한 잿빛과 메마른 갈색 대신에 소담스러운 흰색이 한가득이었다. 지난밤 꽤 많은 눈이 내린 탓에 이 세상 모든 허물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세상을 넋을 놓고 바라보자 내 가슴 한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한 행복이 차올랐다.


8시. 드디어 기차는 창원중앙역에 도착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코발트블루 빛깔의 하늘을 배경으로 희끗희끗한 정병산 산자락이 완만하게 펼쳐져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낯선 풍경에 신기해하며 나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까지 대략 3km, 30분이면 넉넉히 도착할 수 있다. 하얀 눈밭에 반사된 햇빛은 유달리 찬란하게 빛났다. 그리 멀지 않은, 진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게다가 며칠 전 열린 지방노동위원회 심문에서 나는 보기 좋게 승리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전문위원 보임이 부당하다는 판정을 받았기에 내 마음은 한없이 가뿐한 상태였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창원대학교를 관통해 걸어갔다. 후문으로 향하는 공과대학 건물 모퉁이를 도는 그 순간, 나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두 눈에 선명하게 쏟아져 들어온 하나의 장면 때문이다. 새하얀 눈을 소복이 뒤집어쓴 채 수줍은 듯 다소곳한 빨간 꽃무리. 그건 “한겨울 설경 위에 다섯 장 꽃잎으로 단아하게 단장한 동백꽃”이었다. 작가 황인숙이 말한 것처럼 “어느 날 나무는 말이 없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하나, 둘 이파리를 떨군다.”


나무 의사 우종영은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에서 동백나무의 장렬한 낙화를 찬미한다. 아름다움이 한창 절정일 때 그 모습 그대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박수 칠 때 떠나야 한다는 사실, 떠난 자리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겨울에도 짙푸른 잎을 달고 있는 상록의 동백나무. 더구나 그 꽃은 한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붉게 피어나 한겨울의 매서움을 무색케 한다. (․ ․ ․ ․ ) 한겨울 설경 위에 다섯 장 꽃잎으로 단아하게 단장한 동백꽃을 본 적이 있는지. 절개를 지킨 여인네가 죽어 동백꽃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던데 딱 맞는 말이지 싶다. (․ ․ ․ ․ ) 내가 동백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때는 한창 꽃이 피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꽃이 몸뚱이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다. (․ ․ ․ ․ ) 한겨울 붉은 꽃으로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드는 동백꽃. 그 꽃은 꽃잎 하나 시들지 않은 채 꽃송이 그대로 툭 떨어져 생을 마감한다. 한 치의 미련 없이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왜 그를 순교자에 비유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 ․ ․ ) 조금 더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꽃잎 한 장씩 떨구며 사라져도 그 선연한 아름다움에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텐데․ ․ ․ ․ .


나는 아침저녁으로 동백꽃과 인사하며 교감했다. 여느 꽃들과 사뭇 다르게 결코 시들지 않은 채 꽃송이 그대로 툭 떨어지는 그 모습은 실로 장엄했다.


나는 꼬박 1년 동안을 기차로 통근하다 드디어 가족이 있는 대구로 돌아왔다. 무려 10년 만의 귀향. 게다가 중앙노동위원회는 3개월 정직이 부당한 처분임을 판정했다. 나는 1년 6개월 동안 서대구 지사장으로 근무하다 얼마 전 정년퇴직했다.


나는 짙은 녹색 이파리, 붉디붉은 꽃잎, 드문드문한 노란색 수술의 절묘한 조화를 캔버스에 고스란히 담았다. 나는 그림의 이름을 <동백의 꿈>이라고 이름 붙였다.


동백의 꿈 - oil on canvas
동백의 꿈은 봄 너머의 희망!
차디찬 겨울, 참고 견디고 버티는 겨울나무의 계절이다.
동백이 그리는 겨울의 끝은 과연 무엇일까?
영원한 소멸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