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4월은 생동감 넘치는 연둣빛 이파리가 온 천지를 찬란하게 수놓는다. 약동하는 환희가 그득할 계절, 비로소 봄이 내 곁으로 오고야 말았다.
T.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라고 했다. 시인 박목월은 4월은 "빛나는 꿈의 계절"이고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이어서 "생명의 불꽃을 밝혀 든다."라고 했다.
지워도 선명하고 닦아내도 또렷하다. 그건 쉽사리 그만두거나 함부로 버릴 수 있는 허튼 기억이 아니므로. '이젠 그만 생각하겠다.'라고 하는 순간부터 비록 마음에선 멀어지고, 눈엔 보이지 않고, 뇌리에선 잊혀도 그 기억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난 그 숱한 많은 기억을 어찌 단번에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 있겠는가. 설령 기억에서 사라져도 느낌은 여전히 남는다.
마치 비가 온 뒤 마당에 풀이 번지듯 어느새 확 피어난 그 지독한 외로움.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외로운 게 뭐 대수라고. 외로우면 좀 어때. 외롭다고 죽진 않잖아.’
나는 참고 견디고 버텼다. 때론 밀물처럼 밀려드는 허무함에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인연들을 보면서 관계의 덧없음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다. 길고 긴, 어둡디 어두운 아득한 절망 속에서 내 가슴은 고통에 짓눌린 채 냉담하게 굳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하루하루 다르게 절망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옭아매고 잡아 붙든 감정은 슬픔이다.
나는 참혹한 슬픔을 내 삶의 동력으로 삼아 해고 이후 여태까지 햇수로 4년을 꾸역꾸역 지탱해 왔다. 악취를 풍기는 썩은 생선마냥 내 가슴 한쪽에 눌러앉은 그 슬픔은 내 마음을 혼돈으로 가득채웠다. 나는 슬픔을 초대하기는커녕 결코 받아들인 적도 없었지만, 그 슬픔은 어느새 내 영혼 깊숙이 스며들어 나를 오롯이 정복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 슬픔이 늘 내 곁에 있었기 때문에 내 삶이 무너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스물여섯 해를 평온하게 다닌 직장, 빛나는 성취를 거두며 온갖 영광을 누린 직장에서 하루 아침에 추방됐다. 그건 해고가 아니라 추방이었다.
문득 내 가슴에 쿵 하고 큰돌 하나가 얹힌 기분. 꿈에서조차 상상한 적 없지만 결과는 딱 그렇게 되었다. 너무 잔인하고 너무 비열하게. 작은 것을 크게 부풀리고, 부작위를 작위로 조작하고, 오랜 관행을 무시한 채 법과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해 한두 번도 아니고 마지막까지 숨통을 조였기에 그들은 지독하게 잔인했다. 궁핍함을 모면하려고 저들을 대신할 희생양에게 엉뚱한 올가미를 씌워 마녀사냥하듯 조롱했으므로 비열했다.
내 심장엔 큼지막한 가시가 박혔지만 결코 터지지 않았다. 다만 온통 멍이 든 채 보라색으로 변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세상의 경계에 섰다. 나는 낯설고 불편한 세상과 맞닥뜨렸다. 언제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한 채 온갖 비바람을 막아주던 낙원과 다름없는 온실에서 추방돼 황량한 광야로 내동댕이쳐졌다. 세상은 그지없이 차갑고 냉혹했고 인정사정 없었다. 나는 당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서글프고 울적했다. 나는 주저 앉았다. 사람의 몸에서 어쩌면 그토록 한꺼번에 모든 힘이 다 빠져나갈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쓸쓸한 저녁을 억지로 버텨야 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가로등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그림자는 늘 하나뿐이었다. 나는 밤을 밝히는 여린 불빛을 등대 삼아 호숫가를 산책했다. 혼자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마음은 복잡했고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나는 간절히 원했다. 잊는 것도 지우는 것도 힘이 드니 내 머릿속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기를. 온갖 헝클어진 상념에 젖어 숱한 사람들과 교차하며 지나갔다. 한번 스치고 지나갈 뿐 어떤 여운과 미련도 남기지 않는 타인들. 그들의 가슴에도 나처럼 허전함과 쓸쓸함이 가득했을까.
삶은 길이와 넓이를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삶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웠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나는 앞으로 가능한 수많은 경험과 만날 작정이다. 세상에 대한 갈증, 사람에 대한 목마름, 예술에 대한 허기, 지식에 대한 탐구, 느낌에 대한 열망으로 나를 다그치고 볶아치면서.
언제나 미완성인 채로 살아가는 게 인생이다. 지금 당장 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을 다해 살면 그만이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 꿈을 찾아 전속력으로 달려갔지만 끝내 그 마음을 거두고 다시 돌아오는 게 과연 실패일까. 그 무엇에 모든 힘을 다 쏟아부은 그 몰입은 지극한 행복이고 무한한 기쁨이 아닐까.
나는 세상사람들이 모두 다 실패라고할지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고 싶다. 그때 비로소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도 덩달아 웃지 않을까.
끝! 서럽고 서글프다. 끝에서는 어째서 지난 시간을 부정하는지, 왜 나쁜 기억만 떠오르는지 당최 모르겠다. 켜켜이 쌓인 숱한 추억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 어쩌면 그토록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지, 그걸 생각할 때마다 나는 아프게 버둥거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