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의 만남과 라온제나

자이가르닉 효과에서 즐거운 우리 셋

by 자유와 예술


추석 연휴 다음 한글날!

30년 다닌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후 쉬는 게 일상인 지금, 쉬고 또 쉬는 숱한 나날 중 하루에 불과해도 아주 특별한 날이다.


대구에서 경북 영주로 가는 고속버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펼친다. 최근 양장본을 새로 구입해 정독했다. 이젠 줄 그은 문장 하나하나를 느긋하게 음미할 차례다. 소가 이미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 씹듯 의미 있는 문장을 곱씹으며 반추하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내 눈에 들어온 건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제우스가 알크메네에게서 아들 헤라클레스를 얻자, 아내 헤라는 화가 나 그에게 '광기'라는 저주를 내린다. 헤라클레스는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죄갚음을 위해 에우리스테우스 왕의 명령으로 12가지 과업을 수행한다. 이는 일련의 불가능한 임무인데 힘, 지혜, 인내, 용기 등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 단순한 힘의 과시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영웅의 여정을 상징한다.


네메아의 사자 퇴치 무적의 가죽을 가진 사자를 맨손으로 죽이고, 그 가죽을 갑옷으로 삼았다.

레르네의 히드라 처치 잘릴 때마다 두 개로 재생하는 히드라를 이올라오스 도움으로 재생을 막으며 제거했다.

케리네이아의 암사슴 포획 아르테미스 신의 사슴을 1년간 추적해 생포했다.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생포 산을 파괴하는 멧돼지를 눈 덮인 산으로 유인해 지치게 한 뒤 생포했다.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 30년 묵은 외양간을 두 강물을 이용해 하루 만에 청소했다.

스팀팔로스의 새 퇴치 아테나 여신의 청동 방울로 새들을 하늘로 유인한 뒤 활로 처치했다.

크레타의 황소 포획 포세이돈이 보낸 황소를 맨손으로 제압해 미케네로 데려왔다.

디오메데스의 식인마 길들이기 식인마를 길들이고, 왕을 말에게 먹여 길들였다.

히폴리테의 허리띠 획득 아마존 여왕의 허리띠를 평화적으로 얻었고 헤라의 계략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게리온의 소 떼 몰아오기: 세 개의 몸을 가진 거인 게리온의 소 떼를 바다를 건너 데려왔다.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 획득 아틀라스와 협상해 황금 사과를 얻었다.

지하 세계의 케르베로스 포획 저승의 문지기 케르베로스를 맨손으로 제압해 데려왔다.



살다 보면 은연중에 숱하게 실수한다.

아무런 악의가 없는, 무심코 내뱉은 사소한 말 하나가 날카로운 비수처럼 타인의 심장에 깊이 박힌다 부지불식간에 드러낸 찰나의 눈빛은 영원토록 타인의 뇌리에 새겨져 영겁의 세월 동안 녹슬지 않는다. 타인의 섬세한 배려와 따뜻한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며 고마워할 줄 모르기도 하고 엉겁결에 맞이한 어쩌다 행운을 의당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고 쌓인 건 카르마, 즉 업보가 되고 끝내 네메시스의 저주를 받는다.


나는 어느덧 책을 덮고 깊은 잠에 빠진다. 앞으로 내가 풀어야 할 숱한 업보를 생각하면서.


단잠에서 깨어나 차창 밖을 보니 어느새 풍경이 변해있다. 파란 하늘에 점점이 박힌 새하얀 구름이 유달리 희다.며칠 내내 내린 가을비 덕분에 생기를 잔뜩 머금은 숲은 넘실대는 황금물결과 더불어 멋진 조화를 이룬다. 가슴 한편에 차오르는 충일감, 이 감정의 근원은 무엇인가!


1시간 40분을 달려 도착한 영주! 소란이 사라진 고요의 세계, 바쁨 대신 느긋함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나는 만났다. 자그마치 30년 만에 그를 만났다.

내가 결혼할 때 잠깐 본 후 아주 오랫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지낸 그. 몇 년 전 우연찮게 연락처를 알았고 그새 드문드문 문자로만 연락했던 그. 그러다 한여름 어느 날, 시간이 괜찮을 때 한번 만나자고 약속했던 그를 결국 만났다.


자이가르닉효과! 미완성 효과라고도 부르는, 끝내지 못한 건 계속 생각이 나는 법이다.

나는 밀린 숙제를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고, 그러다 길고 긴 연휴를 맞아 불쑥 만나자 제안 했고 그는 흔쾌히 응답했다.


30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편안했다. 세상의 중심에서 차츰차츰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선 지금의 나, 애써 감출 것 하나 없고 굳이 피할 것도 없잖은가. 페르소나는 벗어던지고 마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드러내면 그뿐 아니겠는가. (뭐든지 상대에게 맞춰주는 그는 나와 다르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니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제일 먼저 찾은 건 풍기역 앞 〈한결 청국장〉

작년 가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고위정책과정 26기 동기들과 먹은 후 1년 지나 다시 찾은 곳이다. 여전히 웨이팅 하는 손님들이 밖에서 묵묵히 대기한다. 깔끔하고 정갈한 밑반찬을 향해 쉴 새 없이 젓가락이 춤을 춘다. 평소에는 짙은 냄새 때문에 청국장을 꺼려 하는데도 이곳에서 선택한 메뉴, 부석태 청국장 정식은 여느 가게와 사뭇 다르게 내 입맛을 돋운다. 게다가 인삼을 넣은 솥밥에는 윤기가 흐르고 숭늉은 내 속을 편안하게 만든다.


우리는 미리 예정한 대로 소백산 자락길을 걷는다. 물소리가 거칠고 요란스럽다. 가을장마 덕분이다. 초암사에서 부처님께 큰 절한 후 달밭골 어느 카페에서 따뜻한 라테를 마시며 족욕하는 신기한 경험. 산 중턱에서 무슨 족욕? 말로 하면 믿기 힘들다. 백 번 듣는 거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셀레네 유황 족욕 카페〉


30년만의 만남을 기념하듯 함께한 또 다른 친구와 함께 우린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근 채 지난 기억을 떠올리고 지금의 근황을 나누며 앞으로의 설계를 펼쳐 보인다. 여태 저마다 다른 모양의 삶을 살아왔듯 앞으로 여전히 다른 빛깔로 채색하며 저만의 세상을 펼쳐 보이지 않을까.


감기 기운으로 컨디션 난조를 겪는 친구는 떠났다.

둘만 남았다. 30년 만에 만났으니 술 한 잔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나의 일방적 제안을 그는 물리치지 못한다. 늘 양보하고 배려하는 착한 심성은 여전하다.


영주를 대표하는 고깃집에서 갈빗살을 안주 삼아

나는 소주를 들이키고 그는 맥주를 마신다. 한 시간 남짓 지나자 불콰 해진다.

제주도를 제외하곤 전국을 자전거 종주했다는 그의 취미에 장단을 맞춘다. 평범한 절보다 험하고 인적 드문 암자를 찾아다니는 그의 걸음에 덩달아 흥을 돋운다. 죽기 전 꼭 소설을 쓰겠다는 내 오랜 다짐을 그에게 전한다. 여기저기서 한 달 살이를 하겠다는 계획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낯선 길을 가겠다는 결심도.


30년 만의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대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밀리고 밀린 숙제를 끝낸 홀가분함! 내 어깨를 짓누른 압박감이 사라졌다.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장 알라딘 중고서점을 찾는다. 여전히 알딸딸한 상태로 세 권의 책을 고른다.

언제 읽을지 모르지만, 읽을 책이 수북하게 쌓인 모습만 봐도 나는 마냥 기분이 좋다. 가을걷이를 끝낸 농부가 잔뜩 쌓인 쌀자루를 볼 때마다 느끼는 그 풍요로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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