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불쑥 내 가슴속에 박힌 그 꽃
햇볕이 따가운 한여름 어느 날, 숱하게 많은 연한 주황색 나팔모양 꽃들이 황토벽을 타고 올라 담장 너머로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작디작은 꽃송이들을 가려줄 솔개그늘조차 없었다. 뙤약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그 뜨거운 담장 위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려고 저리도 애를 쓰고 있는 것일까. 나는 걸음을 멈춘 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주황과 빨강과 노랑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꽃무리의 화려한 춤사위를. 나는 마냥 넋을 놓고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능소화!
유별나게 슬프고 애잔한 전설이 있는 꽃이다. 궁녀 소화는 임금님과 하룻밤 연을 맺는다. 그 후로 임금님은 소화를 다시는 찾지 않는다. 혹여 찾아올까 기대하며 매일 담장 너머로 고개를 빼 기다려보지만 결국은 헛된 꿈이다. 한평생 그리워하다 마침내 궁궐 담장 아래서 꽃으로 피었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꽃으로 다시 피어날까.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한여름에도 지치지 않고 계속 피어날까. 작달비가 내려도, 천둥 번개가 내리쳐도 능소화는 고개를 쭉 내밀고 그 누군가를 기다린다. 애타는 기다림에 지쳐 결국 떨어지지만, 시들지 않은 채 활짝 핀 꽃송이 그대로 남는다.
능소화는 하늘을 능가하는 꽃이다. 웅장한 기상과 명예와 자존심을 상징한다. 사람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든다. 어느 누군들 한결같은 사랑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불현듯 「원이 엄마의 편지」를 모티브로 한 소설 『능소화(4백 년 전에 부친 편지)』를 생각했다. 금세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 가득 먹먹함이 차올랐다. 나는 다시 능소화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 아니면 두 번 다신 볼 기회가 없다는 듯이.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마치 가슴에 든 멍처럼 유난스레 새파랬다.
얼마 뒤 나는 숱한 고민과 여러 번의 수정 끝에 내 나름의 방식으로 네모난 캔버스에 능소화를 활짝 피워냈다. 파란 하늘 아래 황토색 담벼락을 온통 오렌지색으로 물들인 능소화를 내 마음속 깊이 가뒀다.
1998년 4월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이응태 부인의 편지는 슬픈 사랑 이야기다. KBS TV 〈역사스페셜〉에서 『조선 판 사랑과 영혼”』으로, 『450년 만의 외출』이라는 무용작품으로, 『원이 엄마의 편지』라는 창작오페라로, 소설 『능소화(4백 년 전에 부친 편지)』로 다시 피어났다.
'원이 엄마', 즉 이응태 부인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한지에 붓으로 구구절절 썼다.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서리를 돌려 글을 썼고, 첫 부분의 여백에도 글을 썼다.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주세요.”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작가 조두진은 이들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능소화(4백 년 전에 부친 편지)』로 감정이 절제된 간결한 문체로 그려냈다. 짧게 만나 사랑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런 사랑이다. 능소화가 곱게 피던 날 만나 능소화가 만발한 여름날 이별하는 <응태>와 <여늬>의 사랑 이야기는 서럽고 안타깝다. 하늘이 정한 운명을 거스르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애절함은 결국 영원불멸의 사랑으로 끝맺음한다. 어찌 가슴 서늘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바람이 불어 봄꽃이 피고 진 다음, 다른 꽃들이 더 이상 피지 않을 때 능소화는 붉고 큰 꽃망울을 터뜨려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 산짐승과 들짐승들이 당신 눈을 가리더라도 금방 눈에 띌 큰 꽃을 피울 것입니다. 꽃 귀한 여름날 그 크고 붉은 꽃을 보시거든 저인 줄 알고 달려와 주세요. 저는 붉고 큰 꽃이 되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처음 당신이 우리 집 담 너머에 핀 소화를 보고 저를 알아보셨듯, 이제 제 무덤에 핀 능소화를 보고 저인 줄 알아주세요. 우리는 만났고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떠난 후에야 비로소 그리워지는 법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함께 있어도 그리워했는데 당신이 가시고 없으니 그리움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강물은 굽이굽이 만나고 헤어지기를 거듭하지만 끝내 다시 만나는 법이라고 하셨지요. 걸음을 재촉한 강물도, 더디 흐른 강물도 바다에서 만나기는 매한가지라고 당신은 힘겨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지요. 저는 당신이 힘겹게 이어가신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서둘러 떠나셨고 저는 남았지만 우리는 바다에서 만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