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 이반 4세, 그도 결국은 작디작은 심장 하나를 가진 사람이었다.
러시아 최초의 차르! 이반 4세.
그의 삶은 온갖 상처로 얼룩진 불행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독살, 왕비의 느닷없는 죽음, 아들의 죽음. 그는 ‘뇌제’라 불렸다. '번개의 황제'라는 뜻의 일본식 한자어 뇌제(雷帝)는 공포스럽고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나 인물을 가리키는 칭호다.
빅토르 바스네초프
이반 4세 초상화
1897. 캔버스에 유채. 247x132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그는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530년이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죽었다. 다리에 생긴 종기가 패혈증으로 변한 탓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 모스크바 대공이 됐다. 어린 그를 대신해 어머니('엘레나 글린스카야')가 섭정했다.
그녀는 자리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남편의 형제들 ('유리 이바노비치' '안드레아 이나보니치')을 투옥하고 사형시켰다. 그녀는 귀족인 오블렌스키 공작과 스캔들이 날 만큼 가깝게 지내며 친삼촌('미하일 글린스키야')을 제거해 친정과의 인연까지 끊어 버렸다.
5년이 지나 이반 4세가 여덟 살이었을 때, 그녀는 갑자기 사망했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지만 귀족과의 극심한 권력 투쟁 끝에 독살을 당한 것이었다.
이반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생존이 목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권력을 장악한 귀족은 이반과 그의 말 못 하는 동생('유리')을 왕궁의 첨탑에 가뒀다. 대공이었지만 시종 한 명, 군사 한 명도 거느리지 못하는 신세였다. 그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한당했다.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았고, 더러운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다. 귀족들은 이반을 그들의 장난감처럼 다루었고, 심하게 구박했다. 심지어 고문까지 했다. 특히 슈이스키 가문과 비엘스키 가문이 그를 멸시하고 학대했다. 이반 형제가 깨끗한 옷을 입고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날은 오직 왕실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그때는 깨끗한 옷을 입고 국민들 앞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당시 권력을 장악한 중앙귀족('보야르')이 이반을 살려 둔 건 집단지도 체제를 유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반은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독살, 삼촌들의 반역, 귀족들의 암투와 음모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자랐다. 그는 총명하고 영리했지만 점점 우울해졌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성격으로 변했다. 배고픔과 살해 위협을 견뎌야 했다. 하루하루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는 제대로 된 사랑과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치열한 생존 전쟁만 목격했다. 그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어느 누구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반은 지독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자신이 최고 권력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했다. 때로는 자신의 존재를 잔인한 성정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어느 날 회의에서 자신을 모욕하고 멸시했던 슈이스키 가문의 대표('안드레이 슈이스키')가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자 그는 명령했다.
“그를 죽여라.”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아무도 말을 듣지 않자, 그는 다시 한번 명령했다. 그래도 아무도 말을 듣지 않자 그는 자신의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슈이스키를 잡아 그가 기르던 맹견 우리 안으로 던져 버렸다. 이를 지켜본 귀족들은 경악했다. 그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예상을 뛰어넘는 잔인함을 의도적으로 드러내 귀족들이 공포를느끼게 했다. 귀족들은 더이상 그를 어린아이로 여기지 않았다. 조금씩 대공으로서 예우했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앙 귀족, 의원, 관료, 지주계급과 대립되는 지방 귀족, 지식인, 상인, 평민 계급과 연대했고 그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반은 1546년 결혼했다.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러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로마노프 가문('아나스타시야 로마노프나')을 선택했다.
1547년. 그는 열일곱 살에 정식으로 차르가 됐다. 이반 4세! 러시아 역사상 첫 황제다. 그는 대주교('마카리'), 사제('실베스트르'), 시종관('아다셰프'), 장군('쿠릅스키')을 참모로 기용했다. 물론 가장 핵심 참모이자 정치적 동반자는 황후('아나스타시야')였다. 그는 황후를 지극히 아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녀 앞에선 감정을 다스리고 얌전해졌다.
이반 4세는 즉위 초에 많이 고전했다. 모스크바에 큰 불이 났고 국민들의 삶도 안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점차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슴속 깊숙이 켜켜이 쌓아둔 트라우마, 콤플렉스, 복수심, 폭력적 성향, 의심병을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정치적 동반자였던 황후뿐 아니라 대주교, 관료, 귀족, 장군 등 개혁적인 측근을 주변에 배치했다. 비록 귀족집단과 대립했지만 적절하게 소통하는 유연한 리더십도 발휘했다. 그는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통치술로 즉위 후 13년 동안은 훌륭한 군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쳤다.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새로운 법전을 제정하고 상비군을 조직했다. 군주의 명령과 제도를 국민이 추인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특히 서유럽 국가를 모방한 의회 제도는 혁신적이었다. 그는 의원들에게 ‘시민 대표자’ 자격을 부여해 이들이 국정에 직접 참여할 뿐만 아니라 감시하는 권한까지도 부여했다. 이처럼 그는 공국 수준의 러시아를 국가 형태로 확 변모시켰다. 그러자 지방관료, 귀족, 청년 지식인이 그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귀족과 대립할 때마다 국민들과 직접 소통했다. 국민들은 그를 ‘우리의 자랑스러운 왕’으로 존경했다.
통치에 자신감이 붙은 이반 4세는 강력한 군대를 조직해 몽골 지배의 잔재였던 '카잔한국', '아스트라한국', '크림한국'을 공격했다. 집권 후 불과 3년 만이다. 몇 년간의 집요한 공략 끝에 마침내 '카잔한국'과 '아스트라 한국'을 병합해 북유럽, 발트해, 크림반도로 진출했다. 영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해 서유럽의 선진 문물을 직접 받아들였다. 이제 러시아는 유럽 세계에 정식으로 편입됐고, 자연스럽게 국제적인 지위가 상승됐다.
1553년. 스물세 살인 이반 4세가 갑자기 중병에 걸렸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귀족, 관리, 장군을 불러 자신의 어린 아들('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마치 그의 아버지('바실리 3세')가 했던 것처럼. 충성 서약은 그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흐름으로 연결됐다. 권력은 태생적으로 늘 불안정하므로 작고 미세한 균열만 생겨도 금세 흔들리며 요동을 치는 법이니까. 귀족들은 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측근('아다셰프', '실베스트르')은 충성 서약을 했던 황태자가 아니라 이반 4세의 사촌 형('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을 차기 차르로 내정했다.
얼마 뒤 기적이 일어났다. 이반 4세가 병을 떨치고 일어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 대신 자신의 사촌 형이 다음 차르로 내정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속으로 분노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측근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속으로 삼켰다. 아직은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 확고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삶이 언제나 기쁨과 행복으로 넘쳐날 수는 없다. 삶에는 늘 시련과 고통이 준비되어 있다. 그건 어느 순간 불현듯 갑자기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이반 4세도 그 운명에서 결코 비껴갈 수 없었다. 온갖 불행을 한꺼번에 몰고 올 깊고 어두운 그림자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1560년. 이반 4세가 서른 살 때, 그의 최고 참모이자 유일한 소통 창구였던 황후('아나스타시야')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녀는 명문가 출신으로 그가 추진하는 개혁의 핵심 참모였고, 정치와 인생의 동반자였다. 그런 존재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느끼며 비통해했다.
짙은 어둠이 깔린,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적막한 광야에 그는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분명하게 느꼈다. 이제 확실히 변해야 했다. 철저하고 완전하게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이반 4세! 그가 드디어 폭력성과 잔인성의 봉인에서 풀려났다. 그는 분노를 마음껏 표출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하루아침에 잔인하기 그지없는 폭군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했고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며 자신의 정적들이 황후를 독살했다고 믿었다. 그는 주변 사람을 증오하며 그들을 오로지 제거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는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측근들('아다셰프' '실베스르트'), 사촌형('블라디미르')뿐만 아니라 그동안 자신에게 반감을 보인 모든 귀족들을 일거에 처형했다. 아군과 적군의 구분없이 마구잡이로 제거했다. 심지어 그들의 가족까지 모조리 처형할 정도로 아주 냉혹했다.
무릇 자극이 있으면 반응이 있는 법이다. 역사학자 토인비 말처럼 도전과 응전이 바로 역사 아닌가. 드디어 귀족이 결집해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반 4세는 잠시 모스크바를 떠났다. 그리고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알렉산드로프스키 성에 머문 채 귀족과 국민에게 편지를 썼다. 일부 귀족들의 위협과 무시와 압박 때문에 차르의 권위가 흔들리고, 군주로서 통치 행위를 제대로 할 수 없다,라는 내용으로.
이 편지가 공개되자 지방귀족, 지식인, 청년, 젊은 군인들이 이반 4세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국민 여론도 황제에게 우호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지방귀족, 즉 드보랸은 이반 4세에게 파격적인 권한을 부여하기로 약속했다. 반역과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들은 재판 없이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그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친위 궁정 쿠데타는 성공했다.
그 무엇에도 견제당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 드디어 이반 4세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는 친위부대('오프리치니나')를 조직했다. 6천 명의 부대원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탔다. 개 문양을 달고 빗자루를 들고 다녔다. 검은 제복은 죽음과 공포를 상징했다. 개 문양은 황제를 비방하는 모든 사람을 개처럼 물어뜯겠다는 굳은 뜻이었다. 빗자루는 반대 세력을 모조리 쓸어 버리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이는 뿌리 깊게 이어져 온 러시아 비밀 경찰의 시초였다. 그들은 차르를 비방하거나 불만을 표시하면 누구든지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제 러시아는 공포에 휩싸인 채 깊게 신음했다.
1570년. 이반 4세가 마흔 살 때,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학살이 일어났다. 그는 오프리치니나 부대에게 적대 세력의 본거지 '노브고로트'를 흔적도 남기지 말고 파괴할 것을 명령했다. 무려 수만 명의 시민들을 일주일 동안 학살했다. 도시는 결국 폐허가 됐다. 이 사건으로 지방 귀족과 지식인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반 4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안드레이 쿠르프스키'는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군주는 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와 생명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 그러자 이반 4세는 즉각 답장을 보냈다. “나는 신이 준 권력을 받은 차르다. 나의 통치 행위는 역사에서만 평가받을 수 있다. 차르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반역이며 나의 모든 행위에 국민들은 지지를 할 의무가 있다.” 그는 이제 폭군을 넘어 정신병에 걸린 광기의 황제가 됐다.
이반 4세는 황후('아나스타시야')의 죽음 이후에 아홉 번 결혼했다. 두 번째 황후('마리아')는 독살됐다. 세 번째 황후('마르파 소바키나')는 결혼 3주 만에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다 죽었다. 이처럼 그의 결혼 생활은 파탄의 연속이었다. 어느 누구도 황제를 제어하지 못했다. 아무도 그를 쫓아내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반드시 꼭대기, 즉 정점이 있다. 무엇이든지 정점을 지나면 비로소 옅어지거나 사그라든다. 이반 4세의 분노와 광기도 드디어 정점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1581년 11월. 그가 쉰한 살 때, 드디어 비극이 일어났다. 어느 날 이반 4세는 아들('이반')과 며느리('엘레나 쉐레메테바')와 함께 왕실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는 며느리가 임신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얇은 옷을 입었다고 꾸짖었다. 화는 더 큰 화를 부르는 법이다. 그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급기야 며느리의 배를 발로 찼다. 그 충격으로 며느리는 유산하고 말았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원망의 말을 마구 토해 냈다.
'제발 좀, 그만하세요! 아버지를 저주할 겁니다.'라고, 이반 4세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너를 후계자로 삼고 얼마나 아꼈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저주란 말이냐?' 그는 폭발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는 쇠지팡이(또는 지휘봉)로 아들을 마구 내리쳤다. 손이 가는 대로 마구 휘둘렀다. 어느 순간, 황태자는 갑자기 목이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은 것이었다. 그는 경련을 일으켰다. 팔다리가 기괴하게 휘는가 싶더니, 그대로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이반 4세는 그제야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온몸에서 힘이 풀린 그는 더 이상 서 있지 못했다. 기어가듯 아들에게 다가간 그는 아들의 머리를 잡고 목을 세워보고 팔을 들어 올렸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한순간에 모든 게 다 끝나버렸다.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온 이반 4세는 아들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사흘 뒤 황태자는 세상을 떠났다. 이반 4세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다. 그는 고독하고 외로웠다.
1584년. 쉰네 살 때 이반 4세는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가장 유력한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다. 체스를 두고 일어서는 도중에 발을 헛디뎌 뒤로 넘어지며 뇌에 큰 상처가 나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신의 부하('벨스키') 여동생을 강간하다가 이를 본 벨스키가 격분해 목을 졸라 죽였다는 주장도 있다. 어찌 됐든 러시아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손에 쥐었고 이를 가장 잔인하게 행사했던 폭군의 시대는 비참하게 끝났다.
훗날 사람들은 이반 4세를 뇌제(雷帝)라고 불렀다. 러시아어 '그로즈니', 즉 공포 또는 잔혹이다. 그는 37년 간의 재위 기간 중 초반 13년을 제외한 24년을 압제와 폭압으로 통치했다. 자신을 신성불가침의 신적인 존재로 만들고 스스로 고립됐다. 군주의 잘못은 아무도 지적할 수 없고 신하와 국민은 무조건 군주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겪은 죽음의 공포, 가장 믿고 의지했던 황후의 느닷없는 죽음, 가장 안전해야 할 궁중에서 연이어 터진 독살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었으리라. 이 모든 과정을 힘들고 외롭게 관통하면서 그는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혼자 살아남는 법을. 그는 황후의 죽음 이후에 아무도 믿지 않았다. 측근도, 개혁의 동반자도, 성직자도, 군인도, 국민도 심지어 아들까지도 믿지 않았다. 결국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그의 생애는 결국 비참하게 마감했다.
이반 4세의 죽음으로 600년간 지속되던 류리크 왕조는 명맥이 끊겼다. 이반 4세의 뒤를 이어 둘째 아들('표도르 1세')이 즉위했다. 그는 지적 장애를 앓았고, 얼마 뒤 죽었다. 모든 권한은 그의 처남('보리스 고두노프')이 쥐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아들('드미트리') 역시 어린 나이에 암살당했다. 결국 실권자였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가 됐다. 그후 이반 4세의 황후('아나스타시야')의 동생인 니키타 로마노프의 손자가 차르가 됐다. 그가 바로 미하일 1세였다. 드디어 로마노프 왕조가 활짝 열린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일리야 레핀은 아들을 죽인 이반 4세를 캔버스에 표현했다.
〈이반 4세와 그의 아들〉
슬픔에 찬 얼굴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이반 4세. 뇌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공포에 질려 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동공에는 공포와 절망, 좌절과 죄책감이 서려 있다. 피가 콸콸 쏟아지는 황태자의 머리를 틀어막고 있는 황제의 손은 한없이 가냘프다. 머리털 한 올과 핏줄 한 가닥까지 마치 비명을 내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어둡기만 한 옷, 여윈 몸, 쏙 들어간 볼에는 처연함이 잔뜩 묻어있다. 송곳처럼 뾰족한 지팡이는 그가 얼마나 예민한 삶을 살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존재 자체가 공포였으니 황제 아닌 뇌제(雷帝·the Terrible)라고 불렸던 이반 4세. 그도 결국 사람이었다. 작디작은 하나의 심장만 가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