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서 만난 천사
삼성서울병원 소아응급실에 들어오니 이미 응급실 침대는 다 차서 소파가 있는 곳에서 정신과 당직 선생님이 오시길 아이와 함께 기다렸다. 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아이는 소파가 아닌 바닥에서 손과 발을 모으고 무릎에 머리를 파묻었다. 나도 아이 옆에 같이 나란히 바닥에 앉아 응급실에서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 어린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 간호사들의 응대하는 목소리 등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마침내 머리가 길고 깊고도 옅은 갈색 눈동자를 지닌 조용한 분위기의 여자 선생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그분은 외모만큼이나 차분하고 안정된 목소리로, 그리고 난생처음 느껴보는 부드러운 따듯함으로 아이에게 지금의 상태를 물으셨다. "죽고 싶어요. 죽게 해 주세요" 아이의 흐느끼는 듯한 말을 들으시더니 그분도 아이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 맨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서 아이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기 시작하셨다. 아이가 부모와 관련된 말도 편하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난 아이 옆을 황급히 떠나 보이지 않는 곳에 다소 멀리 떨어져 앉았다. 하지만 한쪽 귀를 쫑긋 세우고 어떤 대화가 오고 가는지 숨어서 다 들었다.
처음 뵈었다. 온몸으로 우리의 말을 듣는 분은... 그동안 친절한 분들은 많이 만나보았지만 단순히 친절하다는 단어만으로는 그분을 표현하기엔 너무나 부족하다. 마치 한 영혼이 다른 한 영혼을 만나 그대로 투명하게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담아내듯 우리의 눈을 마주하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눈빛과 흐트러짐이 없는 몸짓은 마치 '다른 모습을 한 나'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겉으로는 의사와 환자의 보호자로 만나 환자의 증상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나는 그분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내가 그동안 준비하고 다녔던 아이의 모든 처방전들과 검사자료들을 정성스럽게 하나씩 전념해서 읽어보는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진으로도 남기고 차트에 기록하는 모습이 왜 이리 먹먹하고 애달프게 파고들까요?' 아이는 지금 당장 입원이 필요한 긴급한 상태였지만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입원처방은 응급실에서 당장 해 줄 수 없는 안타까운 사정을, 그리고 그 대처방안을 차분하고도 안정감 있는 말로 아이를 위해 진심으로 전달하는 그분(타인)에게서 우리는 처음으로 '사랑'이란 것을 느꼈다.
그분은 아이가 그동안 다녔던 대학병원에서 쫓겨나 당장 입원할 곳이 없어 헤매게 된 것에 대해서도 아이에게 대신 사과를 했다. 그리고 직접 나서서 서울삼성병원에 입원자리가 날 때까지 아이를 받아줄 수 있는 안전한 2차 보호병동을 갖춘 병원을 알아봐 주겠다고 아이와 약속을 했다. 그래서 아이는 그동안 무서워서 가지 않으려 했던 2차 병원 보호병동을 가는 것에 마음을 열게 되었고 발작이 나려던 마음이 다소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는 자기를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분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건 고마운 것이 아니야... 당연한 거야." 하고 아이의 눈을 마주 보며 말씀하셨다.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아! 이 모든 상황이 우리의 마음을 몹시도 가난하게 만들었고 그런 우리에게는 그분이 마른땅에 단비같이 고마웠지만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본질이구나!!' 나는 다시 한번 더 그분의 살아온 배경이 몹시 궁금해졌고 그분의 말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죽으려던 자기를 천사가 와서 오늘도 구해주었다고 했다. 그분은 아이에게 진정제 주사와 계속 음식을 거의 먹질 않고 있는 아이의 영양상태를 고려해서 영양수액도 처방해 주셨다. 하지만 그분은 소아청소년 담당은 아니어서 아이를 환자로 받아줄 수 없었고 1년 가까이 기다려 온 원래 예약되어 있는 교수님이 아닌 다른 소아정신과 담당 의사 선생님께 외래 예약을 앞당겨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장 입원을 빨리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셨기에 아이는 잠자코 받아들였다.
마침 침대가 하나 비어 아이는 그곳으로 가 누웠다. 수액을 맞으며 잠을 청하려 했지만 응급실은 응급한 상황의 아이들이 계속 들어와 어수선하고 무척 시끄러웠다. 아이의 얼굴이 다시 다소 어두워져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누워있던 아이가 일어나더니 수액 주삿바늘을 빼고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다급히 간호사를 불러 도움을 청하자 경호원 한분이 오셔서 나와 함께 아이를 힘으로 저지시키고자 거의 30분을 아이와 대치하였다. 도와줄 수 있는 다른 경호원이 오지 못 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강박할 수 있는 줄도 여기 응급실에는 없어서 나는 바닥에 앉아 아이의 상체를 뒤에서 붙들고 경호원은 아이의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힘껏 누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경호원의 조끼도 찢고 아프다고 울면서 응급실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있는 힘껏 질렀다. 온 통 땀으로 흥건히 젖어 힘들어하고 있을 무렵 다른 경호원들이 나타나 발작하는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한분이 아이 위로 올라가 온몸으로 제지하고 다른 분들은 침대를 이동시켜 급한 대로 임시로 마련한 독방으로 아이를 옮겼다. 그 사이 연락을 받고 당직 정신과 의사셨던 그분이 다시 나타나 다른 진정제와 주사를 급히 추가 투여했고 아이 곁에 한참을 머물다 가셨다. 그때에도 그분은 아무 가구도 없는 방에 침대 프레임도 제거하고 매트리스만 깔린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아이의 손을 잡고 이마를 쓰다듬으며 온몸으로 진정시켜 주셨다. 마침내 아이는 잠이 들었고 나는 힘이 빠져 한동안 멍하니 앉아 아이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다음날 오전에 전출 갈 병원이 정해질 때까지 임시 독방에서 아이와 함께 그날 밤을 차디찬 바닥에서 이불하나 없이 가방을 배게 삼아 노숙자처럼 보내야 했지만 마음만은 그분으로 인해 훈훈했고 이 일 또한 하나의 인생 경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시설 괜찮고 청소년을 전문으로 받아주는 2차 보호병동에는 자리가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외적으로 직업적인 관계가 아닌 하나의 소중한 생명으로 전심으로 우리를 대하셨던 그분도 결국에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아이에게 하셨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