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누군가에게는 공포, 누군가에겐 희망

페스트를 읽고나서

by 꿈꾸는 담쟁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나오는 문구는 이러하다.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빗대어 대신 표현해 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표현해 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

이 책의 제사를 읽으며 ‘왜 감옥살이를 제사로 사용하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을 하면서 그 의문점은 풀렸다. 이 책의 원제는 ‘수감자들’이었다고 한다. 어쩌다 페스트로 이렇게 사람들이 격리가 되었기에 그 제목이 ‘페스트’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감옥살이처럼 페스트가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도시에 퍼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갇히게 된다. 전에 책을 읽을 때는 ‘페스트가 무서운 병이었지’에 그쳤지만 코로나를 겪고 있는 우리의 일상을 보면서 우리의 삶과 비슷하여서 더욱 소설에 빠져들었다. 이 책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리유의 직업은 의사이다. 아마 페스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직업이 의사이기에 주인공의 직업이 의사로 설정 되었을 것이다. 병원의 수위인 미셸에게 리유가 병원 계단에 피가 흘린 쥐가 있다고 알린다. 이에 수위는 계속 쥐에 집착하다가 그는 페스트로 죽게 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오랑시에는 페스트가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 피해를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 신문기사인 랑베르가 그러한 사람이다. 이는 오랑의 사람도 아니고 취재차 잠시 들렸는데 도시에 폐쇄령이 내려서 꼼짝달싹도 못하고 이곳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 여러 가지방법을 찾는다. 고위직의 사람도 만나보았고 거액의 돈을 지불도 하였다. 하지만 실패하였다. 랑베르와 같이 이방인이면서 여기에 갇힌 또 한명의 사람이 있다. 그는 장타루이다. 그는 호텔에 묵으면서 페스트가 도시를 덮친 후에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는 이 페스트가 사라지는데 동참하기 위해서 그는 리유를 찾아가 봉사를 자원한다. 이 두 사람의 이방인의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을 삶을 살아야 하는지 확연하게 보여준다.


이 페스트로 인해서 사람들 간의 삶이 많이 무너진다. 오랑시 밖의 사람과 편지도 처음엔 주고받다가 점점 소식이 끊기기 시작한다.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며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무엇보다 빈부격차가 늘어난다. 물품이 줄어들어 가난한 사람들은 더 힘들지만 부자들은 버틸 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유언비어로 알코올로 소독해야 한다고 여기저기 소문이 퍼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랑베르 처럼 신문기자로 일하는 사람들이 밖에 쥐에 관심이 쏠려 쥐가 거리에 무더기로 죽으면 그걸 기사로 쓰려고 난리지만 집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출판업자들은 미신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여 돈을 벌기도 하였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신부였다. 그 중 파늘루 신부는 오랑시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우뚝 솟아올랐다. 페스트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하느님이 내린 벌이라며 회개하라고 사람들에게 다그쳤다. 그를 신봉한 사람들이 우르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리유는 이렇게 말한다. “파늘루는 학자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보진 못 했습니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진리 운운하는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시골 신부라도 자기 교구 사람들과 접촉이 잡고 임종하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어 본 사람이면 나처럼 생각합니다. 그는 그 병고의 유익한 점을 증명하려하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할 겁니다.”

리유의 말을 곱씹어서 생각해보았다. 우리도 코로나를 바라보는 자세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설교로 열심히 응원을 받던 파늘루 신부는 남자들의 모임에서 설교 하였지만 사람들의 동의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페스트에 걸렸을 수도 있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장타루와 리유의 대화 속에서 나온 말 중 하나가 있다. 페스트가 유행하여 시민들이 죽었지만, 시체를 목욕시키는 사람만은 살아남았다. 그들은 자기 일을 멈추지 않고 해왔는데도 말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우리도 코로나 속에 살고 있으면서 자유에 제약은 받을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우리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코로나를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야 함을 보여준다. 이건 어떠한 정치적 논리로도 해결 할 수 없는 일이다. 코로나에 관심을 가지고 이 코로나가 언제든 나에게도 닥칠 수 있기에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고 코로나를 위해 개인적인 위생을 철저히 하면서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코로나를 바라보면서 죽음도 항상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세상에 다시 쥐가 나돌아 다니는 것을 보며 페스트가 사라졌다고 환호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페스트균은 죽거나 소명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 십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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