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대접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나를 위해 큰돈을 쓰는 일은
늘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건조기 구입보다는 내 손으로 빨래를 털어 널고,
에어컨 곰팡이쯤은 직접 닦아내면 된다고,
그렇게 내 시간을 깎아내는 것이
돈을 대하는 정직한 태도라 믿었다.
하지만 나 대신 돌아가는 기계와
나 대신 땀 흘리는 전문가의 손길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아껴온 것은 돈이 아니라,
고작 몇 푼의 지출을 막기 위해
매일같이 포기해 온 나의 '평온함'이었음을.
01. 지출의 고통을 늦추려는 기이한 미루기
나는 지독하게 물건 사는 일을 미루는 사람이었다. 당장 필요한 생필품조차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결제 버튼을 누르기까지 며칠, 길게는 몇 달을 망설였다. 어차피 사야 할 물건이고 나중에 산다고 가격이 내려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미뤘을까. 결제창을 누르는 순간 통장에서 숫자가 빠져나가는 것이 마치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상실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건조기 역시 그 미루고 미루던 목록의 가장 상단에 있던, 나의 거대한 저항선이었다.
02. 자잘한 인내와 거대한 폭주 사이에서
이토록 인색하게 자신을 검열하던 나였지만, 사실 나의 지출 패턴에는 기묘한 균열이 있었다. 몇 백 원 차이에는 벌벌 떨고 배달비 3,000원을 아끼려 빗속을 걷던 내가, 차를 사거나 인생의 큰 결정 앞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수개월을 고민해도 모자랄 거액을 덜컥 질러버릴 때, 나는 내가 대범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대범함이 아니라 '인내의 폭주'였다. 평소에 나를 너무 쥐어짜며 살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 쌓인 결핍의 에너지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로 터져 나온 것이다. 자잘한 나를 대접하지 못한 벌은 그렇게 거대한 청구서로 돌아왔다. 극도의 인내와 극도의 폭주 사이에서 나는 늘 위태롭게 서 있었다. 작은 지출에 벌벌 떨던 그 인색함과, 한 번에 터져 나오는 폭주는 결국 '나를 귀하게 대접하지 못한다'는 똑같은 병명에서 시작된 증상들이었다.
03. 18만 5천 원으로 산 ‘전문가의 4시간’
최근에는 에어컨 청소를 위해 전문 업체를 불렀다. 18만 5천 원. ‘아빠였다면 겉뚜껑을 뜯고 직접 닦으셨을 텐데’라는 익숙한 검열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전문가의 숙련된 시간을 존중해 보기로 했다.
장장 4시간 동안 에어컨을 완전 분해하고 곰팡이를 고압 세척하는 기사님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묘한 미안함과 동시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만약 내가 직접 했다면 반나절을 꼬박 허비하고도 털어내지 못했을 그 막막한 노동을, 그분은 정직한 땀방울로 해결해 주고 계셨다.
기사님이 쾌적한 바람을 되찾아 주시는 동안, 나는 곁에서 조용히 이 글의 첫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그분의 노동이 없었다면 결코 확보하지 못했을 이 귀한 ‘나만의 시간’이 너무나 소중해서, 나는 지갑을 열어 지불한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청소비를 낸 것이 아니라, 나를 대신해 땀 흘려준 누군가에 대한 예우이자 나 자신에게 선물한 평온한 4시간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다.
[Self-Check] 나는 나를 '귀빈'으로 대접하고 있나요?
아래 항목 중 내 실행과 닮아 있는 문장이 있다면 체크해 보세요. (나를 위한 지출에 어떤 저항이 있는지 살펴보는 과정입니다.)
* [ ] 나는 나의 시간을 벌어다 주는 서비스나 가전을 구매할 때, 유독 돈 아깝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 [ ] 나는 물리적인 편리함을 얻은 직후, 기쁨보다 ‘사치했다’는 죄책감을 먼저 느낀다.
* [ ] 나는 자잘한 푼돈은 지독하게 아끼면서, 가끔 감당하기 힘든 큰 지출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한다.
* [ ] 나는 필요한 물건을 살 때, 최대한 미루고 미루며 결제의 순간을 늦추려 애쓴다.
* [ ] 나는 확보된 여유 시간에 휴식하기보다, 또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만약 하나라도 체크하셨다면, 당신은 편리함이라는 권리를 누리는 대가로 죄책감이라는 통행료를 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 통행료를 끊고, 확보된 시간 속에 오롯이 당신 자신을 앉혀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