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차 노비의 회고록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견디기 힘들었던 것들 중 하나는 고객들의 요구가 무엇이 되었든 들어주어야 하는 '을'이라는 나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임신 후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회사를 때려치고 나왔고, 그 후 어딜 가든 내가 소소하게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지. (물론 이미 뼛속까지 을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어딜 가든 엄청 친절한 고객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그 후로 4년.
내 신분은 지금 천민. 노비다 노비!
남편도 밖에서는 과장뉨이지만 퇴근하는 그 순간부터 노비로 전락한다. 평일에는 주말을 그리워하고, 주말에는 월요일을 그리워하는 불쌍한 아빠노비...크흑
1년차.
신생아 때에는 육체노동과 더불어 약 1년 간 우리 주인 아씨 곁을 단 한 시간도 떠날 수 없는 족쇄를 차고 있었다. 젖병도 싫다, 분유도 싫다, 거기다 뱃골은 작아서 조금씩 자주 잡수시는 아씨가 혹여 굶주리실까 하여 항상 그 곁을 지켰다.
손에 똥 묻히기를 일상으로 여기며 똥오줌 치우고 엉덩짝 씻기는거야 뭐 일도 아니었고,
잠에 대한 부분은... 말하는 입이 아프고 타이핑하는 손가락이 아플 것 같으니 생략. 그저 눈물만.
친구들한테 첫째 때는 살 다 빠진다고.. 임신 중에 걱정 말고 먹고 찌우라고 조언한다. 실제로 출산하고 8개월만에 임신 전보다 5kg이 빠져서 중1때의 몸무게로 돌아갔었다. 그 때 사진 좀 많이 찍어둘걸.. 피골이 상접한게, 육아로 생긴 다크써클만 가리면 참 예쁘고 옷발도 받았는데.
2년차.
이유식 한창이던 아씨가 밥그릇을 내던지는 것도 참았다. 굳이 지가 직접, 아니 내가 감히 주둥이를 함부로 놀렸네, 아.씨.께.서. 몸소 숟가락질을 하고야 말겠다고 고함을 치셔서 이유식 스푼에 밥을 떠놓고 밥그릇에 올려드렸더니 그걸 갖다가 그대로 내 면상에 날리기를 일삼으셔도 그냥 허허허 하고 속 없이 웃었다. 우리 귀요미 아씨가 이제 자유의지가 생기셨구나 하며 무릎을 구부리고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그저 한 끼에 다섯 숟가락만 제대로 잡수시라고 애걸복걸하고 숟가락 비행기 쇼를 보여드리던 시절이 있었다.
3년차.
나가자병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리신 아씨를 막을 길이 없어 매일매일 놀이터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겁도 없이 사다리로 미끄럼틀 올라가는거 혹여 떨어질까, 발 헛디딜까 밀착 보호해야 했고, 앞도 안 보고 뛰어다니는 5,6,7세 도령들로부터 지켜야 했고, 미끄럼틀 밑에서 까꿍해주고 시소 태우고 그네는 끝도 없이 밀어줘야 했다. 그렇게 하고나면 동네가 떠나가라 우는걸 끌고 어둑어둑해져서야 밥 먹으러 귀가했다. 한여름에도, 둘째 만삭에도 예외는 없었다. 둘째도 덕분에 뱃속에서 노비 생활. 임신 6개월에도 포대기하고 낮잠 재웠으니 엉엉엉...
그렇게 3년차의 아씨는 놀이터에 도는 오만가지 세균의 온상이 되어 수족구니 뭐니 출산 전엔 듣도 보도 못 한 병들을 얻어오셨다. (돌까지는 흔한 콧물약 한 번 안 먹었던 아씨가...)그럼 우리 노비부부는 밤샘 간호 4박 5일 가는거다.
그리고 4년차.
구체적인 언어구사가 다 되고 자존감이 높아지고 선호하는 것들이 뚜렷해진 아씨는 이제 대놓고 말로 부려먹기를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 진짜 지가 공주고 엄마아빠가 노비인 줄 알아.....
노란 팬티를 꺼내라 파란 팬티는 오늘의 내 취향이 아니라 하지 않았느냐, 엘사는 이제 별로다 다른 공주 신발을 사놓도록 하여라, 털부츠를 꺼내거라 꽃피는 4월이면 어떠하냐, 치마, 치마를 입겠다, 곧 죽어도 나는 치마만 입겠다, 어딜 감히 내 패션에 관여를 하느냐 내가 오징어꼴뚜기같은 패션이 좋다하지 않느냐, 머리는 오늘은 엘사머리, 내일은 안나, 그다음은 쥬쥬머리, 릴리머리를 하거라, 엘사머리 다 묶었다고? 아니다 내가 언제 엘사랬냐, 샤샤머리, 샤샤스타일로 냉큼 바꿔놓으렷다 롸잇나우!!!
- 이것은 패션과 관계된 극히 일부 사례.
오늘은, 스파게리가 먹고싶다. 내가 요리에 참여하겠다. 많이, 많이 만들어라~! (다섯 번 집어먹고) 입맛이 없다, 엄마가 먹여주면 먹겠다, 포크 말고, 엄마 젓가락 말고, 내 보라색 젓가락으로 먹여달라~~!!
아 나도 비록 노비이지만 여기서 뚜껑 열렸다. 이 과정에서 주인 아씨는 이미 주스를 두 컵이나 바닥에 엎질렀다. 한참을 조곤조곤 말하고 침착하게 설득하고 타협안을 제시하던 노비의 하극상이 벌어졌다.
"적당히좀 해! 항상 니가 제일 좋아하는 것만 해줄 수는 없어. 두번째 세번째를 선택해야 할 때도 있는거야!"
결국 아씨는 두어번 받아먹고 끝. 그래 그냥 먹기가 싫은거였어. 그러니까 그냥 그만 먹으랬는데 왜 억지 부리고...하아...
독감 끝물로 컨디션은 많이 회복했는데 격리기간이라 집에만 틀어박혀있으니 자꾸 둘이 부딪혔던 오늘. 웬종일 울고 짜증내다가 눈이 띵띵 부어서, 남들이 보면 독감으로 어지간히 앓고있는 것 같은 얼굴로 하루를 보냈다.
예민하고 고집불통인 아이와 일일이 부딪히자니 체력소모가 너무, 너어어어무 커서 웬만한 자기주장은 존중하고 수용하자는 주의인데 그러다보니 부모는 정말 노비가 된다.
적당한 접점을 찾기가 힘들다. 육아에서 그러한 균형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ㅎ
똑똑하게 육아하기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