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고 젊었던 날의 나에 대한 위로, 그리고 고집쟁이 딸을 향한 응원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낮에 몇 시간 동안 네 살 난 남동생을 나 혼자 돌봐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지방의 한 소도시에서 엄마가 피아노 선생님으로 일 하는 시내 학원 방향을 향해, 동생과 함께 석양 아래에서 "엄마 빨리 오세요~"하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르짖던 때가 있었다. 15층 꼭대기 우리집에서 베란다 박스에 있는 사과를 동생이 밖으로 던져서 경비 아저씨가 올라와 나한테 주의를 주셨던 적도 있었다. 난 그 때 동생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남동생이 커터칼에 손을 베었을 때, 고사리같은 하얀 손이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되었는데 집에 어른이 없어 아랫층 친구 엄마에게 울며 도움을 요청했던 적이 있었다. 동네에서 나는 소문난 애어른이었다.
아빠가 사기를 당해 목장의 소들을 다 팔고 땅까지 떼어먹힌 이후 약 3년. 내가 7살 때부터 10살이 될 때까지 우리가족에게는 암흑기가 찾아왔다. 집도 없이 상경하여, 형편이 더 나을 것도 없는 외가에 1년 얹혀 살기도 했고, 아빠는 학력도 적성도 자존심도 다 제쳐두고 그냥 일자리가 생기면 나가셨다. 엄마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엄마의 손이 한창 필요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에 나는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해서도 나 자신에 기대어 억센 사투리로 큰소리 쳐가며 기죽지 않고 학교생활을 했다. 다행히 너무나 좋은 담임 선생님들을 만나, 응원 받으며 컸다. 외할아버지는 몇 해 전 돌아가시고 홀로 된 외할머니가 아침마다 물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줬다. 아빠는 친가에서 주로 출퇴근하셔서 얼굴 보기 힘들었고, 엄마는 주말도 없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고되게 일하셨다. 당시 두 분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그래도 나는 반에서 1등이었고, 부반장이었다. 빈혈은 좀 있었지만 운동신경도 좋은 편이었다. 형편이 가장 안 좋았던 시기에 학업 성적이 가장 좋았다. 나의 유년시절은 그랬다.(커흙...)
산전수전 끝에 아빠가 안정된 직장에 자리를 잡으시면서 그나마 우리가족에게도 서로를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서울 귀퉁이 반 지하에서 다시 시작한 우리가족은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형편이 나아졌다.
그런데 그 시절을 겪으면서 나는 어떤 아이로 자랐을까.
겉으로 보기에 나는 그저 사교육 없이도 혼자 알아서 잘 하는, 아주 기특하고 착한 아이였다. 엄마 아빠도 항상 나에게 고마워하셨다. 내가 아니어도 이미 충분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부모님께, 이제 막 조금 나아져서 함께 한 집에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계신 안쓰러운 부모님께 나는 어떤 고민도 안기고 싶지 않았다. 12살 어린 나이에 500원짜리 노트 한 권 사기도 아까워서 필기를 줄도 안 띄우고 빽빽하게 했다. 페이지 한가운데에 세로로 줄을 그어서 나누면 노트를 더 오래 사용할 수 있었다. 읽고 싶은 책이 많았지만 책방에서 300원씩 내고 빌려 읽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서 함께 놀다가 다들 밖으로 나갔을 때, 그 집에 있는 책을 읽었다. 뭐 사달라고 조른 기억이 단 한번도 없다.(최소한 내 기억으로는..ㅎ) 초중고 통틀어 12년 동안 미술학원 8개월 다닌 것 외에는 학원에 발도 안 댔다. 학원비가 내게는 너무 크고 아까웠다.
부모님께도 무척 순종적인 딸이었다. 사춘기같은거 집에서는 전혀 티내지 않았다. 대학교 진학 시즌에는 막연히 기자가 되고 싶어 언론정보학을 전공하고싶다 했지만, 싫다싫다 하면서도 결국은 아빠 의견대로 교대에 지원했었고, 떨어지고 나서도 아빠의 2지망이었던 상경계로 전공을 잡았다. (그래도 끝까지 반항한 것 하나가 있다면 공무원 시험 일정을 메일로 보내주시면 그냥 지웠던 것ㅋ 공무원 하라고 보낸 경제학과였지만 그것만은 피했다)
유년시절의 영향은 생각보다 길고 진했다. 대학교 다니는 동안에도 난 이상한 조급증에 시달렸다. 해마다 오르는 등록금을 보면서 어떻게든 해가 또 바뀌기 전에 빠른 시일 내에 졸업하는 것, 그리고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내게 휴학은 그저 돈 낭비,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전공이 지독하게 나에게 안 맞아서 교양과 전공의 학점 차이가 심하게 나는 와중에도 그저 어떻게든 빨리 졸업해서 돈이나 벌자 생각했다. 그리고 졸업 전에 당시 최고 주가를 달리던 증권사에 취직했고, 또 1년 동안 열심히 저축해서 결혼했다.
결혼하고 3년 후,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지만, 나는 퇴사했다.
다시는 금융계통에 발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완전히 독립한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착한아이 콤플렉스에 시달려왔는지를.
그 결과는 참담하게도 남들 보기에만 좋고 내 속은 병들고 썩어들어가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었다.
퇴사 이후 아이들을 키우는 데 집중한 지난 4년 동안, 나와는 애초에 기질적으로 달라서 엄청나게 예민하고 고집불통인 첫째를 보면서 친정 아빠는 "그래, 저렇게 고집이 있는 애가 커서 뭐가 되어도 된다." 하고 날 보면서 약간 놀리듯 말씀하신다.
한 때는 20대 초반에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자책과 더불어 내 진로를 마음대로 하려고 하셨던 아빠에 대한 원망도 함께 뒤섞여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도 아이를 키우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결국 아빠는 딸이 안정되게 살도록 지도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고, 나는 그런 부모님께 걱정 안 끼치는 딸이 되고싶었을 뿐이다. 아빠는 아빠대로 그럴 수밖에 없었고, 나도 나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원망도, 후회도 할 것 없다.
예민하고 고집 센 첫째가 엄마 아빠 입장에서는 여간 맞추기 힘든 것이 아니다. 존중하려 애쓰지만 어디까지가 존중이고 어디부터가 오냐오냐하고 잘못 키우는건지도 구분하기 힘들다. 우리가 왜 이리 이 콩알만한 녀석한테 벌벌 기는건지 순간순간 짜증이 솟구치고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이런 억센 자기주장이 오래오래 갔으면 한다고. 엄마 아빠 눈치를 보기보다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가 쑥쑥 자랐으면 한다. 그러다보면 성장과정에서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이루려면 자기가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런 문제에 스스로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딸을 키우면서 내가 지시하는대로 했을 때 "착하다"는 칭찬은 하지 않는다.
(뭐... 내가 하자는대로 하지도 않는 녀석이다만)
가끔 뒤에다 대고 몰래 "어휴 저 싸가지!"하고 욕할지언정. 난 내 아이의 싸가지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