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져주는 것도 꽤 괜찮아요

두 손 든 엄마의 합리화 아닌 진심

by 육부인


아이에게 습관적으로 들이대던 회초리를 내려놓고 육아서에서 배운 이론을 실전에 적용하기 시작했던 지난 3월 말.

'욱'하는 성격 때문에 매번 다음의 일기와 같은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도 닦는 심정으로 대화에 임했다.

- 2016년 3월 31일의 일기 中 -

1단계 : 인내

오늘 아침부터 긴장을 해서일까. 머리가 아프다. 어젯밤 평소보다 30분 가량 늦게 잠든 첫째가 아침에 일어나기를 힘겨워했다. 그리고 또다시 유치원에 가기 싫다는 말을 했다. 바로 어젯밤만 해도 유치원 너무 재밌다며 유치원 놀이를 했던 녀석이 아침이 되니 태도가 돌변했다. "너 또 왜..."라는 말이 시작되려던 찰나, 육아서에서 그런 말은 금기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꾹 참았다.


"주은이가 많이 졸리구나, 피곤해? 그럼 엄마가 옷 갈아입혀줄게."

살살 구슬려보아도 아이의 입에서는 "싫어" 소리 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 한참 반복되었다. 슬슬 내 심장박동이 정상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속으로는 '정말 너 왜 그러냐, 엄마는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하고 버럭버럭 화를 내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늦어서 유치원 버스를 태우기도 글렀다. 저번 처럼 힘으로 옷을 갈아입히고 억지로 끌고 나가다가는 또 발버둥을 칠 것이고 그러다 다쳐서 또 같은 체육복에 피를 묻히는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 갈아입히려고 꺼내놓은 목요일의 체육복을 보자 그 날의 잔상이 트라우마처럼 머리를 스친다. 그 때의 그 괴물같은 짓은 그만두기로 하자.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잠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전혀 화나지 않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럼 일단 엄마가 주현이(동생)부터 어린이집 금방 데려다주고 올게. 같이 갈래, 아니면 집에 있을래?"

잠시 내가 해탈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아닌가보다. 하루 종일 두통이 가시지 않는 것을 보면)

2단계 : 믿음


집에 있겠다는 선택을 한 첫째를 두고 차분한 목소리로 금방 다녀오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혼자 두고 나간다는 것이 좀 꺼림칙했고 혹시 엄마를 찾으며 울진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저번처럼) 다투다가 화를 내고 나온 것도 아니고 본인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괜찮을거라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유치원 버스를 만나, 선생님께 상황을 대략 설명하고 둘째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었다.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며 만난 딸의 친구 엄마들도 함께 걱정해주었다.

"주은이가 잠이 좀 부족해서 아침에 개운하게 깨지 못 해서 그랬을거예요."

나 대신 친구 엄마들이 딸의 마음을 대신 읽어줬다. 그래, 그랬겠구나.

집으로 돌아오며 책에서 강조한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분명히 이유가 있을거야.'


이 말을 되뇌이며 집으로 들어갔다. 혹시 울고있지는 않을까 하면서 서둘러 문을 열었다.

딸은 방금 유아변기에서 일어나 바지를 입으며 자기가 쉬하고 휴지로 닦는 것 까지 했다며 나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자기가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 잘했어. 나는 엄마미소를 지으며 신발을 벗었다.

3단계 : 공감


열흘 정도 어색함과 어설픔 속에서 계속 연습하고 있는 '~구나'. 남편도 내게 이제는 꽤 자연스러워졌다며 칭찬해줬다. 이제 이 구나체가 필요한 타이밍.


"주은이가 아까는 졸리고 피곤해서 옷 입기가 많이 힘들었구나. 잠이 덜 깼는데 자꾸 옷 입자고 해서 싫었지?"


아이는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4단계 : 여유


이게 참 생각보다 어렵다. 시간 약속이라는게 있고 늦었을 때 발생하는 손해라는게 있는데 뭐든 자기가 혼자 하겠다는 5살짜리를 보채지 않고, 다 해주지 않고 기다린다는 것은 또 한 번 인내를 요구하는 부분이다.

그래도 기다려야 한다. 왜냐고? 5살짜리는 이상하게 재촉할 수록, 도와주려고 할 수록 더 반항하고 신경질적으로 대응한다. 그래서 오히려 더 늦어버린다. (해준다는데 왜?!)

"우리 조금만 서두르자, 시간 다 됐다." 정도의 응원이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NO!


아침엔 어차피 유치원 버스도 보내버린 마당이라 마지막 설득 단계에서 진심으로 여유를 부렸다.

"좀 피곤하니까 우리 아주 천~천히 준비할까?"

잠이 다 깬 딸은 이제 흔쾌히 동의했다. 천천히 아침을 먹고, 체육복을 입고, 머리를 묶고, 원하는 머리핀을 고르고, 아끼는 공주님 머리띠를 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유치원이라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유치원 가는 길엔 곳곳에 개나리가 활짝 피어있었다. 기분 좋은 등원길이었다.





전국에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8월 31일, 오늘 아침에도 나는 아이와 함께 나란히 걸어서 유치원에 갔다.

이렇게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나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아이와 도보로 10분 남짓한 거리를 웃고 떠들며 걸어갔다.

(멀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3주간의 여름방학이 끝나자 유치원에 가는 것이 다시 싫다는 아이와 함께 평화롭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도달한 타협점이었다. 아침마다 짜증이 나는 딸내미를 위해 걸어서 등원한지 2주가 되었다. 매일 아침마다 재촉하고 속 끓던 것이 없어져서 얼마나 살만한지 모르겠다.

아이 역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엄마와 둘이 10분씩 산책하듯 등원하니 매일 기분 좋게 유치원에 간다.

아이의 의견을 수용해주면 이렇게 좋은 쪽으로 변할 때도 있다.

최근 반 년 사이에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새끼를 이기고야 말겠다는 투지가 많이 꺾였다.

아이한테 지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그렇게 "주은이는 엄마 못 이겨요"를 복창까지 시켰던 지독한 엄마였는데 더 지독한 딸 때문에 두 손 들었다.

하지만 그러고나서 딱히 더 나빠진건 없었다. 오히려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 마음을 다 읽은 아이가 여러면에서 안정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건 합리화가 아니라 리얼이다.

지는게 이기는거다~ (에잇!)






이 글은 함소아 앱에서 시리즈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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