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 쓰라린 기억

기억의 왜곡

by 육부인

좋지 않은 기억에 사로잡혀 머리가 어지러운 밤이다. 이상하게 어젯밤 갑자기 20년도 더 된 97년 가을즈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전학 후 미묘한 열등감 속에서 지내고 있었던 나를 너무 가차없이 짓밟아버린 ㅆㄴ이 있었다.


학교에서의 다툼 후 저녁에 집으로 전화가 왔다. 가시돋쳤다는 표현만으로 부족한 그지같은 말을 받아내며 난 아무말도 못했다. 수화기 너머의 아이가, 내가 밀어내려 애쓰던 나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까버렸기 때문이었다.


"애들이 뭐라는 줄 알아? 5학년땐 잘나가지도 못했던게 6학년 되고 반에서 회장이랍시고 설친다고 그래!"


뭐 그런 개소리였던것 같다. 그 '애들'이 과연 두명은 되는 애'들'이었을까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사춘기 치기 어리고 유치한 아무말대잔치이지만, 자존감이 많이 위태로웠던 시기였기에 그 말은 나의 좋았던 대부분의 시간들 마저도 어둡게 물들여 버렸다.


5학년 때 죽은 듯이 지내다 6학년이 되고 다시 예전의 활동적인 모습을 되찾아보고자 애쓰면서 느끼던, 숨기고픈 열등감을 들킨 것만 같았다. 바보같이 방에서 엉엉 울고 있었을 때 분개해서 참지 못한 쪽은 역시 엄마였다. 나같아도 이제 초등학교 입학하는 내 딸이 친구한테 부당한 소릴 듣고 울고만 앉아있으면 그것 만큼 속 터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시 전화를 걸어 엄마가 시킨대로 다다다다 뱉고 끊었지만 내 속은 전혀 개운하지 않았다. 더 우스워보였을 뿐이라는걸 알았기 때문에...


그나마 속이 좀 뚫렸던건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그 아이가 중학교 가서 똑같은 모습으로 야비한 짓들을 일삼다가 터프한 어느 동급생한테 주먹으로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여학생이 여학생한테 학교 복도에서 주먹으로 맞은 사건은 내가 보고 들은 중에 그 사건이 유일하다. 뭐 그 후로도 딱히 원만하지 못하게 지낸다는 소식을 동창들 통해 들으면서 꽤나 유쾌했던 것 같다. 그 아이가 틀렸어. 역시 그 아이가 틀렸던거야. 나에게는 그런 위로였으리라.


5, 6학년 때를 회상하면 특별히 친구관계가 나빴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먹구름 낀 듯 마음이 갑갑할까. 왠지 모르겠는데 그랬다. 힘들었던 것 같았다. 나름대로 뭔가 다시 밝은 모습 되찾고 싶어서 애썼는데 그게 좀 버거웠던 어렴풋한 기억.


잠이 오지 않는 어젯밤,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다다른 사춘기 입문 시절 가장 갑갑하고 아팠던 순간. 지난 20년 동안 아마도 한 번도 떠올린 적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최면술로 끄집어낸 듯 그 말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마치 내가 열세살 꼬맹이가 된 듯 속이 쓰렸다. 자고 일어나면 며칠 걸릴 것도 없이 이립과 불혹 중간 지점에 있는 서른다섯의 성인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본래의 삶을 살겠지.


아무렇게나 뱉은 쓰레기같은 말 한 마디가 나의 짧지 않은 시간에 대한 기억을 왜곡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연락하고 지내는 그 시절의 오래된 좋은 친구들이,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내내 너무나 즐겁고 해맑았던 기억이, 지금도 참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 시절의 나도 제법 괜찮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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