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오해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 준다는 뜻이며, 내가 어떻게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김소연, <마음 사전> 중에서 -
"내가 숨기고 싶었던 내면까지 꿰뚫어 본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적나라한 '이해'일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방이 있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감정,
말하지 못한 생각들,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상처들로 가득 찬 공간이다.
그런데 누군가 조심스레 그 방의 문을 열고 들어와 우리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내면을 바라볼 때가 있다.
처음엔 두렵고 당혹스럽지만
그 시선이 비난이 아닌 이해와 공감으로 가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이해의 따스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해와 오해는 늘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이 둘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맞물려 우리를 새롭게 구성하고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빛과 그림자처럼 하나가 있기에 다른 하나의 존재가 더욱 선명해지는 그런 관계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해받고 싶다'라고 말하지만,
실상 관계를 흔드는 건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완벽한 이해보다 오해 속에서 피어나는 질문과 대화가 더 깊은 관계로 이끌기도 한다. 서로를 향한 호기심이 새로운 이해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누군가 나의 가면 너머를 보려 할 때 그것은 위협이 아닌 가장 순수한 형태의 관심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온전히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안정적인 관계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가능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해는 단순히 '앎'의 차원을 넘어선다. 공감과 긍정, 호감, 사랑처럼 나를 좋게 보려는 마음이 함께 담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느낀다.
설령 그것이 오해일지라도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바라봐 주는 시선에는
나를 존중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해란 어쩌면 내가 원하는 모습만을 '이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다가오는 교묘한 '오해'일 수도 있겠다.
서로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환상.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왜곡된 렌즈.
나와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원치 않기에,
함께 평화롭게 지내고 싶기에,
상대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오해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 오해는 때로 진실보다 더 달콤하게, 더 편안하게 우리 사이를 채워주는 부드러운 완충제가 된다. 온전한 진실을 마주하는 대신 우리는 서로에게 '이해받고 있다'는 위안을 주는 섬세한 오해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해'란 상대가 나를 완벽하게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마음이나 모습을 그 사람의 방식으로 느껴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해조차도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이해와 오해는 그렇게 얽히고설키며 관계를 만들어 간다. 때로는 완벽한 이해보다 따뜻한 오해가 우리에게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진실의 날카로운 모서리보다 오해의 부드러운 포용이 관계를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
결국 우리가 찾는 것은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불완전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따뜻한 시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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