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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친구가 내게 한 말

by 꿈꾸는 나비


무엇 하나에 흠뻑 빠져본 적이 있을까.

겉으로 내색한 적은 없지만

이 질문은 오래도록 마음 한켠에 박혀 있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딱히 어딘가 떠나고 싶지도 않았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과 나누는 말들이 점점 무거워졌고,

만남은 자연스럽게 뜸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는데도

그 안에서 '나'다운 건 별로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그간 어떻게 지내는지 털어놓았더니

친구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그런 사람 아니었는데.

내가 알기론 제일 열심히 살던 사람이 너였거든."


맞다. 나는 늘 뭔가 하며 살았다. 회사 들어간 뒤에도 자격증 공부에 매달렸고, 더 나은 직장을 꿈꿨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했다. '나'를 특별히 들여다본 적은 없었지만, 멈춘 적도 없었다.


그런데 평생 함께할 거라 믿었던 사람과 다른 길을 걷게 되면서 삶이 통째로 멈춰버렸다. 나를 돌보는 방법도 모르겠고,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시간은 그냥 흘러갔고, 불행하다는 생각만 하면서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버텼다.

'하아, 진짜 재미없다........'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면서도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예전의 내 모습은 어디 갔는지 눈 뜨면 밥 먹고 멍하니 시간 보내다가 잠들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하고 이유 모를 답답함이 계속 따라다녔다.


친구 말이 마음 깊이 가라앉았다가

불쑥불쑥 떠올랐다.

무심히 걷다가 발끝이 턱에 걸리는 것처럼

그 말이 생각의 흐름을 툭 끊고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그 말이 내 안 어디선가 잠들어 있던 나를 흔들어 깨웠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렇게는 더 살기 싫다는 마음이 서서히 진해졌다는 거다.


그래서 아주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에 앉는 시간이 조금씩 늘었다. 노트북 켜고 짧게라도 뭔가 써보고, 책도 펼쳐보고, 어제 본 예능 얘기를 블로그에 끄적이기도 했다.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멈춰 있던 시간에 작은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하나씩 쌓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끝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내가 멈춰 서 있는 건지 세상이 나를 두고 가는 건지 헷갈렸다.

답답함이 몸 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뭔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문을 열고 나섰다. 처음엔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파트 단지 한 바퀴 도는 것부터 시작했다. 천천히 걸어가다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체조하는 어르신들 움직임을 따라가 보기도 했다.


웃음소리와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난 그 안에 섞이지 못하고 유령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느 날엔 조금 더 먼 공원까지 나가봤다. 시선을 멀리 두니까 사람들 대신 풍경에 눈이 갔다. 빨갛게 물든 나뭇잎이랑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낯설게 다가왔다.


계절이 이렇게 바뀐 걸 그제야 알아챘다.

내가 얼마나 오래 멈춰 있었는지 실감이 났다.

참 긴 시간을 고인 물처럼 보냈구나.


"넌 뭘 더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친구 말이 또 떠올랐다. 그 말에 힘을 얻어서 한 걸음, 두 걸음 계속 걸었다. 처음엔 억지로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걸으면서 마음도 조금씩 정리되는 것 같았다.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그에 걸맞게 행동하라."

– 세스 고딘

글을 쓰면서 오랫동안 나를 들여다봤다.

그 시간 끝에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힘 있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하면 잘할 수 있으면서도

늘 소심하게, 자신 없게 굴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발휘되기 어렵다는 걸 이제야 안다.


나를 돌보고 사랑하는 연습을 하면서

이제는 힘의 크기를 재지 않는다.

마음먹은 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결국 오래 걸린 건, 마음먹기까지였다.



사전예약 판매중인,

<산책과 문장>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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