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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거면, 더 사랑해 볼걸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며 되새긴 관계의 의미

by 꿈꾸는 나비


어떤 진실은 거리를 두어야만 선명해진다.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 다시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사진을 현상하듯, 시간이라는 현상액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상대방의 눈을 통해 비친 나의 모습들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어떨 때는 따뜻하고 다정했고, 어떨 때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때로는 지나치게 집착했고, 때로는 무관심했다. 각기 다른 상황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나의 여러 얼굴들을 마주하며,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더 일찍, 더 깊이 나를 알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한 마디가 떠올랐다.


"이럴 거면, 더 사랑해 볼걸."


사랑은 가장 선명한 거울이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 우리는 평소에는 숨겨져 있던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질투심, 소유욕, 헌신, 배려심- 이 모든 감정들이 관계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며 우리 자신을 드러낸다. 오랜 시간 함께하는 친구, 매일 마주치는 회사 동료,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 이들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갈등들은 모두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창문이었다. 왜 그 순간에 화가 났을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어떤 말이 나를 상처받게 했을까? 이런 질문들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내 마음의 지형도를 그려나갔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이 더욱 깊어졌다. 고집과 자존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두려움, 사랑한다면서도 상대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모순, 떠나간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돌아서지 못하는 마음처럼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익숙한 모습인가. 특히 상연이 "다시 보지 말자"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결국 은중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그 절절함과 모순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얼마나 그 사람밖에 붙잡을 곳이 없었을까. 자존심을 접고 다시 돌아가는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그리고 은중이 아닌 상연의 감정에 더 깊이 이입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경험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그 두려움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 상대방이 내 곁을 떠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그 불안을 다른 감정으로 포장해 버리는 우리의 모습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용기 있게 사랑한 적이 드물었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는 못다 한 말들이 미련으로 남아 다시 붙잡아보려 했던 기억도 있지만, 정말로 솔직하고 용기 있게 다가선 순간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가듯 애매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뜨뜻미지근한 결론에 도달했다. 친구관계에서는 오히려 단호했다. 한 번 선을 긋고 돌아서면 다시 연락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자연스럽게 멀어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드라마 속 상연의 모습을 보며 지난날의 내 모습들이 떠올랐다. 자존심을 접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 단호하게 등을 돌리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럴만한 용기를 내지 못하고 겁먹고 있었던 것 같다. 용기가 없었거나 사랑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 용기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증거일 텐데 말이다.


감정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곱씹어볼수록 관계의 시작과 끝은 결국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임을 깨닫게 된다. 사랑하면 마음이 흔들리고, 때로는 아프지만, 바로 그 아픔과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조금씩 배워간다. 상대방이 내게서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붙잡고 싶지만 붙잡을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나는 아직 내 마음조차 제대로 붙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때로는 너무 많이 주었다고 후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적게 사랑했다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후회와 아쉬움들이 결국 나를 더 깊이 알아가게 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결국 연애든 우정이든, 모든 인간관계는 나 자신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내 모습들-질투하는 나, 헌신하는 나, 상처받는 나, 상처 주는 나-이 모든 모습들이 진짜 나의 일부분이다.


헤어짐과 붙잡음 사이에서, 미련과 후회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마주한다. 때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때로는 생각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명확한 답을 찾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걸어갈 길이 있다는 것이다.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때로는 헤어지고, 다시 만나면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 간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나 자신과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다. 상대방을 통해 발견하는 내 모습들,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나의 한계와 가능성들이 모두 소중한 배움이 되어 준다. 그래서 지금, 과거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의 나 자신에게도 다짐하고 싶다. 더 용기 있게, 더 솔직하게, 더 깊이 사랑해 보자.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지 말고 거절당할까 봐 주저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사랑해 보자. 그 과정에서 얻게 될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들이 결국 가장 값진 선물이 될 테니까.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 과정 자체가 우리를 더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드라마 속 은중과 상연처럼 때로는 서툴고 모순적이지만, 그렇게라도 끝까지 사랑해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모습이 아닐까.


이럴 거면, 더 사랑해 볼걸.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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