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속 거울
특별히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왠지 싫은 사람이 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불편하고 그 사람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린다. 그럴 때 나는 대개 상대방에게서 이유를 찾는다. '저 사람이 원래 그래', '성격이 이상해' 하면서 말이다.
퇴근 후 친구를 기다리느라 카페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날이었다. 내가 그들을 보는 시선에는 그날의 날씨와 그 순간의 기분 그리고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한 무언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람을 판단할 때 나는 객관적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판단의 렌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상대방보다 내 모습이 더 선명하게 비쳐 있다.
그날 기분이 흐리면 상대의 미소도 어색해 보이고 내 마음이 따뜻하면 무심한 표정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어제까지 좋아하던 친구의 말투가 오늘따라 거슬린다면 그건 친구가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이다. 내 안의 어떤 상처가 건드려졌거나 어떤 불안이 고개를 들었거나 혹은 단순히 잠 못 잤던 밤의 피로가 내 감정을 예민하게 만든 것일 뿐이다.
이유 없이 누군가가 미워지는 순간들의 진짜 이유는 그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보면 마치 도로 위의 교통사고와 닮아 있다. 10대 0으로 한쪽만 잘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겉으로는 한 사람이 먼저 화를 냈고 다른 사람이 상처받은 것처럼 보여도 그 이면에는 복잡한 감정의 연쇄반응이 숨어 있다.
상대방이 던진 작은 말 한마디가 불씨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불씨가 큰 불길로 번지는 건 내 안에 이미 쌓여 있던 건조한 감정들 때문이다. 오래된 서운함, 누적된 스트레스, 충족되지 않은 기대들이 순식간에 타오르며 관계를 태워버린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그 순간에도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보인다. 상대방의 행동은 단지 방아쇠일 뿐이고 진짜 폭발력은 내 안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이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카톡 답장이 늦게 올 때 마음에 여유가 있는 날이면 '바쁘겠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하지만 예민한 날에는 '혹시 내가 뭔가 잘못했나?', '나를 피하는 건 아닐까?'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가족과의 일상적인 대화도 그렇다. 평소에는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사소한 말투가 지쳐 있는 날에는 날카로운 비판처럼 들린다. 어머니의 "밥은 먹었니?"라는 안부도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간섭'처럼 느껴진다. 상대방은 똑같은 마음, 똑같은 방식으로 말했는데 내가 받아들이는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깨닫고 나면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바뀐다. 상대방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왜 내 안에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지금 내 마음 상태는 어떨까?',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들은 때로는 불편하다. 상대방 탓을 하는 게 훨씬 쉽고 편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견디고 내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상대방은 단지 내 마음을 흔드는 계기일 뿐이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돌이 물결을 만들기는 하지만 물결이 어떤 모양으로 퍼져 나가는지는 호수의 상태에 달려 있다. 호수가 깊고 고요하면 잔잔한 물결이 생기고 이미 거칠었다면 더 큰 파도가 인다.
관계는 정말로 거울과 같다. 때로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비춰준다. 질투심, 서운함, 외로움, 분노... 이런 감정들이 관계를 통해 수면 위로 떠오를 때 나는 당황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며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관계가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혼자 있을 때는 모르고 지나쳤을 내 마음의 구석진 곳들을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거울 앞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을 향한 시선도 부드러워진다.
내 안의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상대방의 상처도 보이기 시작한다. 내 불완전함을 이해하면 상대방의 실수에도 너그러워진다. 내가 때로는 예민하고 이기적일 수 있음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그런 모습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결국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이해하는 또 다른 길이다. 상대방은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거울이고, 스승이며, 동반자다.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 자신과 더 가까워진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때로는 힘들고 복잡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나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아프게도 하고 동시에 가장 많이 성장하게도 해준다.
이제 나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어려움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그것들을 단순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기보다는 나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가는 기회로 여긴다. 상대방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한다. 그런 마음으로 관계를 바라보면 모든 만남이 소중해진다. 나를 웃게 하는 사람도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도 모두 나라는 존재를 더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거울들이니까 말이다.
오늘도 누군가와 마주하며 그 투명한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게 되겠다.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놀랍고, 때로는 아름다운 그 모습을 발견하게 되겠다. 그 모든 나를 조금씩 받아들이는 일이 내게 주어진 임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저는 [산책과 문장]
열번째 작가입니다.
10월 25일 토요일 12시-3시
무수책방에서 북토크 진행합니다.
[산책과 문장]으로 함께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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